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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에 대한 "증오는 나의 힘" : 김윤아의 <유리가면>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4-08-19

이메일

iamgodot@freechal.com

조회

6132


권력에 대한 “증오는 나의 힘”: 김윤아의 <유리가면(琉璃假面)>

시의 언어가 지니는 가장 큰 힘들 중의 하나는 음악성이다. 따라서 훌륭한 시는 항상 나름의 음악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지니는 음악성을 발견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시와 음악의 관계를 시간적 차이로 설명하곤 한다. 즉, “당시대의 훌륭한 시는 다음 세대의 뛰어난 대중음악이 된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나면, “당시대의 대중음악에도 시보다 뛰어난 음악이 있습니다”라는 반박의 주장을 듣곤 한다. 그렇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졌듯이 시와 음악의 경계도 허물어진 듯하다. 나는 이러한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혹은 시와 음악의 허물어진 경계를 김윤아의 2집 앨범인 <유리가면>에서 발견한다. 아니면 말고...

김윤아의 <유리가면>은 락, 발라드, 재즈, 탱고 등등의 온갖 대중음악의 장르를 넘나든다. 또한 하나의 앨범에 수록된 열 한 개의 노래가 배치되어 있는 순서는 마치 연작시나 장편소설, 혹은 한편의 훌륭한 영화처럼 느리다가 빠르고, 피를 토할 듯이 울부짖다가 할머니의 자장가처럼 소곤소곤하기도 하고, 탱고의 요염한 리듬은 어느새 재즈의 경쾌함이나 발라드의 유연함으로 변하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곡을 듣고 나면 마치 42.195 km의 마라톤을 달리고 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온 몸의 힘이 소진되어 나른한 잠에 빠지고 싶다는 느낌을 갖는다. 처음으로 앨범을 들었을 때, 나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도록 충격을 준 노래는 다섯 번째 곡인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와 열 번째의 <증오는 나의 힘>이라는 노래였다. 그러나 다시 노래를 들었을 때, 다른 모든 노래들도 마치 잘 만들어진 어부의 그물처럼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아--- 김윤아를 사랑하고 싶다.

노래의 시작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이다. 범상하지 않은 목소리로 감미롭게 들려오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여/ 진청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단 꿈에 마음은 침식되어/ 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라는 가사는 이성과 논리의 언어에 길들여 있는 나의 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뒤를 이어 들려오는 “내게도 이름이 있었다 한들/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노래/아아아 부서진 멜로디만/ 입가에 남아 울고 있네”라는 가사를 들으면서 언어를 이해하거나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내팽개치고 그냥 김윤아가 되어버리는 것이 최상이라는, 즉 노래의 멜로디에 나의 몸을 의탁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느낌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비록 순간일지언정 “검푸른 저 숲 속에도/ 새들은 날아들고/ 아아아---/아아아---/깨지 않을 긴 잠에 든다”처럼 망각의 잠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잠은 죽음이고, 죽음은 “깨지 않을 긴 잠”일 뿐이다.

망각의 잠 속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사랑,/ 빛나던 이름,/ 그리운 멜로디,/ 아련히 남은 상처,/ 지울 수 없을.”이라는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이다.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죽음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이 노래의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끊임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죽고자 하는 예술가의 힘이다. 그래서 김윤아는 사랑과 죽음을 노래한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에/ 그는 더운 가슴도 찬란한 청춘도/ 내일이 없는 듯이 소모해버리고/ 그의 마음엔 온기가 남지 않고/ 그의 두 눈엔 눈물이 남지 않고.”라고... 그래서 김윤아는 “그날 이후 나는 죽었소.”라고 선언한다. 죽음이라는 극한에서 발견하는 <세상의 끝>에는 끝이면서 시작이고 시작이면서 끝인 “너와 나”만이 있다. 망각의 긴 잠에서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세상의 끝”이라는 꿈의 세계는 “오렌지색 하늘엔 달이 두 개,/ 회색 바람이 너를 스치고/세상의 끝엔 너와 나/ 세상의 끝엔 우리 둘”의 발견이다. 놀랍지 않은가? “세상의 끝”이 “나”나 “너”, 혹은 주체나 타자라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와 너, 혹은 주체와 타자의 결합인 “우리 둘”이라는 것을 김윤아가 긴 잠의 꿈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세상의 끝”에 “우리 둘”이 있다는 것의 발견은 죽음, 혹은 긴 잠이 끝나고 다시 생명의 부활이 다가왔다는 신호이다. 그래서 김윤아는 <야상곡(夜想曲)>을 노래한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그래서 마침내 생명, 혹은 삶의 절정인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위험한 사랑”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나에게 누군가가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고 대답한다. 그는 탱고 리듬을 들으면서 마치 <파리의 마지막 탱고>의 영화를 상상하거나 거의 엉덩이까지 양 옆으로 툭 터진 긴 치마와 빨간 장미를 입에 물고 다가오는 이국적인 여성을 상상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다. 김윤아는 나의 속물성을 건드린다. 그래서 그 속물성을 모두 드러나게 만들고, 마침내 나의 속물성을 탱고 리듬의 빛나는 예술로 승화시킨다.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위험한 사랑의 상상은 나를 위안한다.
당신 같은, 위험한 사람.
식품처럼 소모될 열정.

불안하고 달콤한,
나른하고 숨이 멎을 듯한
죄의식과 행복의 기묘한 일체.

나는 위험한 사랑을 상상한다.
위험한 사랑의 상상은 나를 위안한다.
결국은 허무하게
모래처럼 날려 사라질
소진할 열정의 달콤한 폭주

차갑고 농밀한 나의 열정이
내 눈먼 영혼을 잠식하면
뜨겁고 농염한 죄의 입맞춤
타락의 나락, 그 황홀

사랑에 대한 욕망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 그 삶은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라고 노래하는 <봄이 오면 G>의 희망이고, “사랑하기에 나를 떠난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대의 마지막 말/ 그저 나를 이유로 해/ 그의 죄의식을 덜기 위한”이라고 노래하는 의 절망이기도 하고, 또한 “오오, 지워질 기억이여./ 아스라이 잦아드는 마지막 빛의 긴 여운이여.// 이 밤이 지나면 영원의 시간 속으로/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 그대와 나 처음부터 그래야 했어.”라고 노래하는 <미저리>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의 속성이 망각이듯이 삶의 속성은 “세상의 끝”에서 발견한 “우리 둘”의 생적적 관계를 맺으려는 희망이다. 그래서 김윤아는 <봄이 오면 P>를 다시 노래한다. 생성적 관계의 희망을 위해서... 그러나 “우리 둘”의 생성적 관계를 맺으려는 희망을 저해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의 권력관계이다. 그래서 김윤아 “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

<증오는 나의 힘>

매일 내일은 당신을 죽이라라
마음에 마음을 새겼어
수 천, 수 만의 생각이
머리 속을 헤엄치며 무력한 날 비웃고

매일 내일은 구차한 이 내 생을
고요히 끝내리라 꿈꿨어.
수 천, 수 만의 생각이
머리 속을 헤엄치며
비겁한 날 비웃고.
고맙고 고마운 내 아버지
당신을 죽도록 이토록 증오한 덕에
난 아직 살아있고,
증오는 나의 힘,
배신하지 않을 나의 아군,
나의 주인, 나의 힘.

나는 자아를 잃은 증오의 하수인
두 눈에 칼을 심고 가슴엔 독을 품은
꿈에도 잊지 않을 이 사무치는 증오,
당신을 해하리라, 새 날이 오면.

증오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고

검은 증오의 불길이 언젠가는
날 삼키고 난 멸하고 말겠지
이미 지옥 한 가운데 발을 딛고
웃으며 나 가려해 파국에

김윤아의 노래는 파국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친구이며 연인인 아버지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력은 사라지리라. 김윤아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의 라는 노래에서 “열일곱 또는 열 셋의 나/ 모순덩어리인 그 앨 안고/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 조근 조근 말하고 싶어”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하고 생성하고자 하는 여성성의 발현이 아닐까? 그래서 세상의 희망은 크고 작은 우리의 일상적 권력에 대하여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말하는 남성성의 인간이 아니라 모든 권력에 대한 “증오는 나의 힘”이라고 말하는 여성성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김윤아처럼 “열일곱 또는 열 셋의 나”가 되어 “열일곱 또는 열 셋의 나/ 상처투성이인 그 앨 안고/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스물 다섯, 서른”, 혹은 마흔이나 쉬흔이 되어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권력에 대한 “증오는 나의 힘”이라고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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