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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환]'태양의 아들들'을 떠나보내고...

작성자

성은애

작성일자

2004-02-23

이메일

easung@yahoo.com

조회

4969


김동원 감독의 2003년작 [송환]은 기네스북에 오른 장기수 김선명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선택]과 종종 비교되곤 했다. 선댄스 영화제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수상하기도 했으나, 극장 개봉은 3월 `19일인가로 미뤄져있던 상태다. 놀랄 일도 아니다. [송환]은 장장 15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인데다가, [선택]처럼 '인간'이나 '자유', 혹은 '화해'라는 화두에 집중한 극영화가 아니라, 상당히 곁가지 얘기가 많은 영화이며, 화면의 때깔은 후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가, 훤하게 잘 생긴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송환]에는 [태극기 휘날리며] 따위의 싸구려 눈물 자아내려고 아등바등하는 상업영화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감동이 있고, [실미도]나 심지어 진지함이 돋보이는 [선택]이 가지지 못한 미덕이 있다. 그것은 일단 이 영화를 만드는데 투입된 장장 10년간의 제작기간이다. 1992년 3월, 김동원 감독은 30여년을 복역하다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인 김석형과 조창손을 만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2000년 9월, 이들이 북으로 송환된지 1년 후인 2001년, 국가보안법 계류 중이라는 사유로 탑승권까지 발행된 상태에서 평양행이 좌절된 감독은 민가협의 한 여성에게 카메라를 맡겨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후일담을 취재해오도록 한다. 그리고 평양행을 포기한채 작품을 편집하여 2003년에서야 세상에 내놓는다.

그 10년간, 감독은 조창손을 비롯한 수많은 장기수들을 만난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45년을 복역하여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세계기록(! -- 이런 세계기록은 정말 쪽팔린다...) 보유자 김선명과, 일찌감치 전향해서 출소했다가 최근에 와서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김영식을 비롯한 '전향수', 그리고 김선명과 같이 출소했으나 복역 기간이 1년 짧다는 이유로 환영 행사의 화환도 다른 것을 걸어야 했던 안학섭 등도 포함되어있다.

감독이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은 다소 뻣뻣하고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송환 후 1년, 평양에서 만난 이들은 감독이 자기 아들이나 다름없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감독은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었던가?

그들의 수십년간에 걸친 고통과 싸움, 그리고 그 후일담을 구구절절 다 풀어놓기에 2시간 30분은 너무 짧다.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때, 도대체 2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지겨워서 어찌 본단 말이냐, 하던 생각은, 영화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아쉬움, 혹은 간절함으로 바뀐다. 전향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김영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마지막 화면이 정지하는 순간, 목구멍에선 무언가 뜨끈한 것이 치밀어 오르고, 그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는 데는 적잖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감독의 어조와 시선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따뜻하며 또한 차분하다. 그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건강을 염려했고, 그들의 상처를 공감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또한 우리 대부분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고집과 넘어서기 꽤나 힘든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임종하는 순간에도 "동지들은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힘주어 말하는 장면도 보여주고, 무슨 일이 터지든지(화성연쇄 살인 사건을 비롯해서) 자신있게 '모두 미국놈 짓'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단순함이나, '김일성 장군'에 대한 무한대의 존경심과 순수한 그리움, 북한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남한은 '썩은 땅'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감독은 처음부터 조창손에게 호감을 느낀다. 주민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정착해 살던 봉천 9동의 주민들도 자신들을 '계몽'시키려고 하는 엘리뜨 당 간부 출신의 김석형보다는 공작원 연락선의 선원이었던 온화한 인상의 조창손 할아버지를 더 따른다. 그렇지만 영화가 조창손을 중심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장기수들은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채, 영화가 진행되면서 각각의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때로 너무 고집스럽고, 너무 순진하고, 과거의 어떤 시점에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종종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난스럽고 귀엽기까지 하다. 카메라는 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섬세하고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잡아낸다.

이들의 역사는 처절하다 못해 끔찍하다. 송환 당시 생존했던 비전향 장기수의 복역 기간을 모두 합치면 2천년이 넘으며, 이들은 특히 7.4 공동성명 이후 강제 전향 조치로 인하여 엄청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다. 매를 맞으며 6백대까지 헤아리다 정신을 잃었다는 증언이나, 물고문, 딸 이름으로 된 편지를 동원한 정신적 고문 등등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시기에 500여명의 장기수들 가운데 350여명이 전향했다고 한다. 강제 전향의 와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이 자막으로 올라가는 데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들은 집권 초기 '일방적 퍼주기'라는 욕을 먹어가며 북한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김영삼 정부의 추진력에 힘입어 석방과 송환의 희망을 품기도 한다. 93년에 송환된 이인모씨가 그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 내 기억으론 한창 영화계로 진출할 꿈에 부풀어 있던 인기 탤런트 한석규가 장차 영화를 찍게 되면 이인모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모 영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공언한 적도 있다. 그만큼 장기수 문제가 여론의 표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곧 이은 핵 문제와 김주석의 사망은 이들에게도 송환의 전망을 저만큼 멀어지게 했다. 이들의 송환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담이었음은 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고.

그 머나면 옛날의 '대한늬우스'에서 끄집어낸 간첩단 검거 보도나, 전운, 오지명, 현석 등이 주연을 맡았고 주로 변희봉이 간첩으로 출연했던 [113 수사본부]같은 드라마 장면, 그리고 적절한 뉴스 클립들은 이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좀 더 커다란 역사적 흐름 속에 적절히 밀어넣어준다. 또한 '인간 승리'로 존경심을 자아내는 '비전향'의 영광(?) 뒤에서 그들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전향수'들의 후일담과, 비전향 장기수를 가족으로 둠으로 하여 겪었던 고통의 흔적들까지도 골고루 비춰주는 감독의 꼼꼼한 손길은 이 짧지 않은 영화를 더욱 알차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갔다. '태양의 아들'이라는,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같은 뽄새의 촌스런 홍보물도 찍고, 가슴엔 훈장을 하나씩 달고, '금방석'에 앉았다는 선전 책자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감독은 누군가가 평양에서 갖다준 이 선전물들을 우리에게 살짝 구경시켜 준다. 그 보기 민망한 화면과 선전문구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들은 이 장면을 찍으면서 약간 멋적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곤 감독은 할아버지들이 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면서, 동시에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싸움을, 적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그들이 평생해왔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힘든 싸움을 계속 해달라고 주문한다. 10년의 세월이 쌓인 후, 그것은 진정한 '동지애'의 표현인 것처럼 들린다.

동의하지 않지만 인정하고 존경하고 아껴준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분단시대에 가장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 40년, 혹은 50년만에 고향에 돌아간 그 엄청난 오디세이, 책으로 쓰자면 수십권은 족히 써야할 그 이야기들도 감동적이거니와, 그들과 함께한 감독의 그 끈기와 애정과 원숙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음악과 화면빨로 분위기 잡는 싸구려 눈물은 명함도 내밀지 마라.

* 진보네트워크의 참세상 방송국(http://cast.jinbo.net/)에서 온라인 시사회를 하고 있다. 그 기회를 놓치거들랑, 3월 개봉하면 극장가서 꼭꼭 챙겨 보시라. [태극기 휘날리며] 보고 '어머, 원빈 옵빠가 울어...'하며 눈물콧물 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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