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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실미도>의 힘

작성자

장시기

작성일자

200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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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1


영화 <실미도>의 힘

영화 <실미도>의 성공은 단지 감독이나 배우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근대에서 벗어나 탈근대적인 문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그러한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관객이 만든 문화의 승리이기도 하다,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실미도>의 성공을 능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관객의 수”라는 양적인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영화가 주도하는 삶의 내용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기존의 한국전쟁을 다룬 반공영화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의 영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같은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을 다룬 할리웃 영화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다. 국가주의는 깨어졌지만, 가족주의는 살아서 숨쉰다. 이것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폐시킬 뿐이다. 그러나 <실미도>는 다르다. 영화 <실미도>는 새로운 형식의 새로운 내용을 지닌 새로운 영화다. 여기에서 “새롭다”는 것은 <실미도>가 고전적인 근대의 틀, 즉 할리웃의 장르영화들의 특성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실미도>의 성공은 우리의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분단의 삶을 다룬 덕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영화가 삶을 흉내내거나 삶이 영화를 흉내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감추어져 있지만 영화 <실미도>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삶은 영화 <실미도>이다. 우리는 영화 <실미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 곳곳에 내재하고 있는 삶의 생명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목격할 수 있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근대적 삶의 억압과 폭력을 통하여 영화 <실미도>가 이룩한 탈근대적 성취를 더욱 미학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들은 전 지구적으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고통이기도 하지만 우리만이 현실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감각적 기쁨이기도 하다. 영화 <실미도>가 제공하는 고통과 기쁨을 골고루 느끼기 위해선 영화를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성(gender), 가족, 종족 등등의 근대성으로 구성된 그 어떤 코드나 기호의 입장들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실미도>의 성공은 영화가 지니고 있는 “틈새(interval)”의 활용에 있다. 숏트와 숏트 사이의 틈새.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있는 틈새. 영화 스크린이 보여주는 <실미도>의 몽타주와 관객들 사이의 틈새. 그리고 영화관 안과 영화관 밖, 즉 영화와 현실 사이의 틈새. 고전적인 근대의 영화들 속에서 이러한 틈새들은 사진이나 서술을 연결시키는 고리나 그것들을 분열시키는 역할만을 하지만, 영화 <실미도>는 연결고리나 분열의 역할을 뛰어넘어 갑작스런 파열음과 새로운 미래의 생성이라는 캄캄한 순간적 암흑을 생산한다. 따라서 영화 <실미도>를 보기 위하여 정말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예술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화가 제공하는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지각과 정서이다. 근대적 지식과 이성으로 바라본 <실미도>는 강인찬과 김재현, 혹은 조중사를 최고의 휴머니티의 구현으로 찬사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구현하는 휴머니티는 강패의 휴머니티이다. 영화를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근대적 지식과 이성을 뛰어넘어 순수한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감각을 갖추었을 때, 영화 <실미도>가 제공하는 “틈새들”은 캄캄한 암흑이 아니라 미래를 밝히는 환한 등불이 된다.

영화가 제공하는 최초의 틈새는 “박정희의 목을 따겠다”는 남파간첩 김신조 일당의 민첩함을 보여주는 숏트들의 시퀀스와 깡패조직의 행동대원인 강인찬(설경구 분) 일당의 민첩함을 보여주는 숏트들의 시퀀스 사이에 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공간 속에서 교차편집되어 이루어지는 두 개의 행동양식, 즉 북한의 남파간첩들과 깡패들의 행동양식은 그 어떤 서술구조의 연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유사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적의 수괴를 죽여야만 한다는 목적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차이는 목적의 수단으로 한 족은 총과 수류탄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칼과 주먹을 지니고 있다는 것뿐이다. 남과 북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만들어진 두 개의 행동양식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틈새를 통하여 미국의 <9.11 테러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지금 진행 중에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상상은 관객들로 하여금 수많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그 폭력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희생되는 나무나 풀, 혹은 허공의 바람이 되도록 만든다. 나무나 풀, 혹은 바람이나 물의 지각과 정서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지각과 정서가 되는 것이다.

영화의 “틈새”는 무한히 가능한 수없이 많은 숏트와 시퀀스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영화 스크린이 만든 틈새는 김신조와 강인찬이라는 두 인물로 좁혀지는 클로즈 업으로 축소되더니, 다시 “서울”이라는 공간으로부터 “실미도”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남파간첩과 깡패집단의 상호 동일한 행동양식은 “실미도”에서 북파간첩단인 684부대의 “기간병”과 “훈련병”의 상호 동일한 행동양식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실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쇼트들과 시퀀스들 사이에 있는 수많은 틈새들은 기간병 대장인 김재현(안성기 분)과 훈련병 대장격인 근재(강신일 분)의 상호 동일한 행동양식, 기간병 대장의 참모들인 조중사(허준호 분)와 박중사(이정현 분)의 행동양식과 훈련병 대장의 참모격인 강인찬(설경구 분)과 한상필(정재영 분)의 행동양식이 지니는 상호 동일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틈새들이 인물들의 상호 동일성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실미도”에서 이루어지는 영화의 틈새들은 기간병과 훈련병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어 훈련병 3조 조장 강인찬과 684부대 대장 김재현의 감각적 동일성, 즉 그들의 몸과 정신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동물적 감각의 상호침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인찬과 김재현의 동물되기는 기간병과 훈련병이라는 서열구조를 깰 뿐만 아니라 군대나 남한 정권의 서열구조를 깨트린다. 따라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틈새를 통하여 나무나 풀, 혹은 바람이나 물의 감각을 획득한 관객은 동물적 감각을 획득한 강인찬이나 김재현과 감각적 상호침투를 달성한다. 이러한 <실미도>가 보여주는 자연과 동물의 감각적 상호침투는 영화의 가장 큰 틈새, 즉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쟁과 평화 사이의 틈새를 통하여 “실미도”와 “남한”, 그리고 상상적인 “북한”의 동일한 행동양식으로 확대된다. 남과 북의 대립과 전쟁만이 깡패들과 군대들을 양육시키는 본질이다. 따라서 평화는 지루하고 나른하다. 그러나 실미도와 남한, 그리고 북한이라는 폐쇄적 공간은 지루하고 나른할 때를 예비하여 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좀 더 온건한(?) 형태의 대립과 전쟁을 만든다. 대립이나 전쟁의 기간동안 외부의 적을 향한 총칼과 폭력은 평화의 기간동안 내부의 적을 향한 총칼과 폭력으로 전환된다. “5.16 박정희 쿠데타”가 그렇고, “12.12 전두환 쿠데타”가 그렇고, 또한 “5. 18 광주학살”이 그렇다.

내부의 권력투쟁은 폐쇄된 공간인 “실미도”에서 시작하여 더 큰 폐쇄된 공간인 서울로 확대되고, 다시 한반도로 확대될 것이며 최근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서 보듯이 지구라는 공간으로 확대될 것이다. “실미도”의 훈련병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청와대”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가든지, 아니면 스스로 자폭하든지 두 개의 길밖에 없다. 그들은 80년대와 90년대 초반,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학생들의 수없는 자살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폭하는 길을 선택한다. 실미도나 남한, 혹은 북한과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적이 너무나 멀리 있거나 없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자폭하는 길밖에 없다. 사회나 국가가 깡패집단이나 군대집단처럼 자실과 자폭을 강권한다. 군대집단이나 깡패집단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에는 전쟁과 평화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러저러한 형태로 죽음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사회다.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근대가 그렇다.

<실미도>가 제공하는 마지막 틈새는 영화와 일상적 삶 사이에 있다.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미도”의 폐쇄적 공간은 감옥이나 법정을 비롯한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대학과 직장, 그리고 국가와 가족이 거하는 한반도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학교에서 동료 교수들과 대화를 하거나 추석이나 설에 가족이 모여 대화를 할 때, 분단의 장벽이나 군대집단과 깡패집단의 서열구조로 이루어진 삶의 문화는 나와 너를 하나의 폐쇄된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폐쇄된 공간은 강의실이나 술집, 혹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쉽사리 깨어진다. 그러한 열려진 공간으로 나아가 실미도나 남한, 그리고 북한이 존재하는 한반도 전체를 열려진 광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나무나 풀, 혹은 바람이나 물의 감각을 획득하여 상호 감각적 전이를 달성하는 것뿐이다. 실미도나 남한, 혹은 북한이나 지구의 폐쇄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지식이나 이성은 폐쇄된 공간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동물되기나 나무나 풀, 혹은 바람이나 물의 감각을 회복하는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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