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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9세기 초반 콘월지역의 감리교와 민중신앙

작성자

이순구

작성일자

2009-03-01

이메일

leesoonkoo@yahoo.co.kr

조회

2671



2009년 2월 11일 수요일
영미연 근대분과 세미나
발표자: 이순구 (평태대)



1800-1850의 코온월 지역의 감리교와 민중 신앙(beliefs)과 촌락 문화

I

민중종교 연구는 지역을 따져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종교적 관습의 차원은 지역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종파는 여러 다른 패턴들을 따랐다. 지역적 다양성은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끼친 종교의 영향을 논할 때 주의를 기울려야 함을 의미한다. 민중오락의 역사에 대한 최근의 경향에 대한 비판을 보면 전통적인 오락을 개혁시키는 시도에 있어 복음주의자들 혹은 금주 reformers가 소수의 명분의 지지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작은 공동체들의 사회사에 접근해 들어갈 때 똑같은 전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더햄이나 콘월 같은 탄광촌에서 감리교도들은 적어도 영향에 관한한 다수의 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콘월 광부들은 감리교가 일찍 들어오고 대단히 성행한 직업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19세기 초 콘월은 이 운동의 가장 큰 본산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감리교란 웨슬리파 사람들과 거기서 나온 다양한 지파들을 모두 포함한다. 1851년 주일 예배에 113,510 인원이 참석. 이것은 강력한 영향력을 말해준다. 1842 찰스 바햄은 빅토리아조 초기 광부들 인원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는 감리교도 광부들이 대단히 많아서 그것이 다른 공동체에 비해 전체 집단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고 말했다.

광부들의 삶에 대한 감리교의 영향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보자. 첫째, 민중 오락에 대한 그 영향력, 둘째, 그것의 민중 신앙(beliefs)과의 관계다.

우선 금주운동이 콘월에서 이미 자리잡고 있는 감리교를 확장시키고 더 증대시키는 종교적 힘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역할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해서 잘못된 orthodoxy를 만들어 낸다고 오락사의 최근의 연구에서 Gareth Stedman Jones가 비판했다. 이런 입장은 감리교도적 자본주의자적 합리성(rationality)의 발달과 전통적 오락 형태의 쇠퇴를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 뒤에는 ‘사회적 통제’라는 사회주의자의 개념이 숨어 있는데, 이것은 의심스러운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그는 본다. 상류층과 중산층이 노동자 계층을 자본주의자적 계획의 과정에 통합시키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 그들에게 합리적인 오락을 강요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할 때 오락 역사가들은 관점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빠뜨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Stedman Jones의 비난은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한 중요한 수정 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최근 몇몇 연구는 전통 오락 형태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이라는 단순한 개념에 불만을 보였고, 오래된 노동자 오락 문화는 19세기 초반에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확장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종교와 revelry의 대결은 민중 오락사의 일부만이 아니다. 영국을 산업화시키는 데 있어 종교의 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해리슨 박사는 교회와 노동자 계급이 19세기에 가장 자주 접촉하게 된 것은 민중 여가를 지배하기 위한 시도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19세기 기독교인들은 놀음, 간통, 음주, 잔인한 운동, 안식일 깨기, 불경죄 등 모든 오락적 행위의 복합체들을 통탄히 여겼다. 이 모든 것은 경마장, 술집, 극장, 축제, 시장에서 있었다.”

사회적 통제 개념에 있어 한 가지 어려움은 그것이 외적인 힘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 새로운 형태의 행위를 강요함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자 고용주들과 질서를 의식한 치안관들에게는 분명 맞지만, 민중 종교운동에는 꼭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감리교와 금주운동은 의미심장하게도 노동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보수주의와 그 지역 교회 엘리트들의 점잖음에도 불구하고 촌락에서 감리교는 웨슬리언적이고 원시적이며 성경적인 기독교 형태로 19세기 초부터 아주 내면화되어 있었다. 어떤 촌락에서는 채플 회원들은 탄광촌 인구의 분명한 다수를 형성했다.

웨슬리의 잡지는 초기에 감리교가 어느 정도로 오락 시간의 전통적인 사용과 갈등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일날 “춤추고, 싸우고, 욕하고, 저주하고, 공차기하고 등”을 하기 위해 모인 1743년의 뉴캐슬 근방의 광부들의 무지와 사악함에 대한 혐오감을 기록한다. 그곳에서 그는 주일날 Sandhill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내고 있는 불쌍한 군중들을 대면하고자 했다. 아일랜드에서는 그의 설교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광란자들과 춤추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1776년 Otley에서는 지역 축제날에 방문했는데, 그는 “기독교 국가에 수치스럽게도” 도시가 “소음과 술취함과 소동과 혼란” 속에 미쳐버린 것을 보았다.

콘월 지역의 전통적 오락에 대한 감리교의 영향은 금주운동에 의해 1830년대 후반부터 강화되었다. 웨스리언들을 포함해서 초기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해리슨 박사는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거리두기는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콘월 지역에서는 분명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금주운동 모임에 대한 불안한 관용이 그 모임이 웨슬리언 채플에서는 열리면 안 된다는 모임금지에 의해 끝났다. St Ives에서의 즉각적인 결과는 따로 금주 웨슬리언 감리교도를 형성하기 위한 250 신도들의 탈퇴였다. 인근지역의 금주가들이 가세해서 1842년 600 명이 되었다.

51: 금주의 성공과 이전의 감리교의 강함 사이에는 연관이 있었나? 많은 노동자 감리교도들에게는 맹세에 서약한다는 것은 새로운 departure라기보다는 강한 음주에 대한 그들의 기존의 태도의 확장이었다. “구원받은” 술주정뱅이들은 볼만한 서명인들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전형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James Tears는 그가 1838년 1월 콘월을 처음 방문했을 때 기꺼운 반응을 보았다. 처음 모임에서 150명이 서명했다. 1838-1839 사이 그의 성공은 증가했다. 1839년 2월 2500명 인구 중 800명이 서명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5월 가면 St Ives의 2700명은 거의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되었다. 유사한 성공은 서부 콘월 지역의 도시와 촌락에서 있었다. 해리슨 박사는 술집과 금주 단체의 양극화는 도시적 현상이었고 후에야 촌락으로 번졌다고 암시한다. 이게 농촌지역에는 해당될지 몰라도 콘월의 탄광촌에는 맞지 않다. 1788년에 이미 존 웨슬리는 Redruth 감리교도들에 대해 그들은 기꺼이 설교자들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1909년 어떤 목사가 도시에서는 목사가 다스리고 시골에서는 예배당이 민중의 것이고 민중은 신임 목사가 오면 그를 take over한다고 불평할 때에도 반복된다. 지역 목사들과 class leaders가 금주운동에 기꺼이 포함되고자 함은 목사와 교회 기관의 “공식적인”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분명하다. 예들은 절대금주신문에 많이 나온다.

1839년 절대금주운동의 정점은 차티스트 선교사들이었던 Abraham Duncan과 Robert Lowery의 탄광촌 방문과 일치한다. 그들은 절대금주를 공공의 적으로서의 감리교와 동일시했다. ‘절대금주가들과 감리교도들은 연설가들을 독점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반대한다.’라고 로우리가 불평했다. 던컨은 감리교도들이 콘월을 양분시킨다고 발언했다. “절대금주가들은 영토 분리를 유지한다. . . 종교운동과 금주운동 사이로 상당한 양의 enterprise와 재능이 흡수된다.” 그는 바리새인적인 은어가 모든 절대금주 모임에 있었다고 보았다. 연관은 콘월에는 성경 기독교인(Bryanites)이 수와 영향력에서 웨스리언들 다음이었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되었다. 따라서 1840년대 가면 “오락 향상의 가장 중요한 유일한 agency는 증가하는 금주운동이었다”는 베일리 교수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이 무렵 콘월에는 지속적인 제재와 압력을 강화하고 증폭시켰다는 것도 강조해야 한다.

52. 18, 19세기 콘월의 변화하는 오락의 패턴 뒤에는 두 개의 주요한 범주로 크게 분리될 수 있는 압력들이 감지된다. 1)광산업의 자본주의자적 변형이 광부들의 여가 시간의 양에 주는 영향, 2)복음주의적 압력. 두 번째 범주는 광부들의 유흥을 본질적인 잔인함, 부도덕, 일반적인 불분명한 죄성 때문에 비난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도덕적인 reformers는 여가시간의 사용을 전통적인 사용 대신 향상시키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목표를 둔다. 따라서 그들은 counteractive force이자 counter-attractive force로 간주되어야 한다. 18세기 중반부터 인간적인 목사들은 빈자들의 유흥의 많은 것들에서 잔인함을 공격했다. 그리고 민중 축제와 관련된 술취함을 통제하고자 했다. 감리교도들은 더 나갔다. 즐김에 대한 그들의 청교도적 혐오는 세속적 오락을 본질적으로 죄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게으름에 대한 그들의 엄격한 증오는 그들만의 이유 때문에 시간 낭비를 비난하는 고용주들과 같은 마음을 갖도록 했다.

콘월 광부들은 18세기에 많은 휴일을 즐겼다. 그런데 점점 이것은 19세기 전반에 사라졌다. 어떤 특정한 관습과 관련되지 않는 휴일은 광부들이 side-show, beer-tents, dancing 외에도 전통적인 운동인 던지기와 레슬링을 하며 즐긴 모임을 위한 행사였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그와 같은 모임은 지나친 음주와 소란, rowdyism으로 특징지어진다는 비난들이 자주 퍼부어졌다. 이러한 놀이는 어떤 휴일에도 마련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특히 교구 축제와 관련되었다. Borlase는 1758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교구는 매년 축제를 갖는다. 그런 경우 다른 때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모두 주일날 친구와 친척을 entertain하기 위해 변통하고자 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모든 업무가 정지되고 청년들은 모여 교구 지역에서 던지고 레슬링을 한다.”

53. 당시의 던지기, 레슬링 경기 묘사. 이러한 경기들의 사라짐에 대한 Polwhele의 묘사: “평민들 가운데서 이러한 운동의 횟수에 있어서의 끊어짐은 그들의 지배층의 습관과 풍속에 있어서의 변화 탓으로 돌릴 수 있다. 17세기 Carew의 시절엔 신사들은 두 개의 큰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농부들을 그들의 성과 집으로 초대해 먹였다. 우리들의 거실이 축제의 놀이의 목소리로 울릴 때면 잔디밭과 구릉지대와 삼림지대에서는 레슬링과 던지기의 외침으로 울렸다. 환대가 이제 사라졌고, 함께 하던 운동들도 사라졌다.”

54. 성공회 목사들은 민중 여흥의 행위에 다소 맞섰다. St. Gluvias 성전은 1796년 bullbaiting(개를 부추겨 소를 물어 죽이는 옛 구경거리)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Borlase는 과도한 음주와 frolicking이 교구축제를 제도와 그 불규칙한 observation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의 공격으로 만들었다고 슬퍼했다. St. Erme의 교구목사는 1750년대 교구 축제를 특징지었던 레슬링, 던지기, 그 외 운동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해 칭찬 받았다. 감리교도들은 비난의 톤을 바꿨다. 운동들은 그 자체가 본질적인 죄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저명한 지역 유지였던 William Carvosso는 청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닭싸움, 레슬링, 카드 게임, 주일 안 지키기 등과 같은 당시의 유행하고 있던 죄들에 끌려 다녔다.” 그 외 다른 예들.

19세기 초가 되면 광부들의 행위를 변화시키려는 감리교도의 성공에 대한 요구는 정기적으로 제기되었다. 1802년 레슬링의 쇠퇴에 대해 한 작가는 --“이 지역의 오래된 주민은 모두 얼마나 그게 쇠퇴했는지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다.”--치안관이 소요의 모임과 살인을 통제하는데 많은 것을 했지만 감리교도들의 기여가 주요했다고 주장했다. 6년 뒤 성공회 목사는 감리교도들에게 그러한 운동들이 사라짐에 대해 더 큰 공을 돌렸다.

55. 설교시간에 정기적으로 비난받긴 했지만 레슬링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공공연한 후원의 감소는 그것을 선술집과 더 긴밀한 동맹관계 속으로 몰고 갔다. 술집과 맥주집은 많은 광부의 오락에 중요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했다. 1839년에는 어떤 지역에서 탄광이 시작되자마자 맥주집이 개업해 “정직하지만 생각 없는 광부들을 악의 소굴로 이끌어 돈을 마구 쓰도록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임금 받는 날은 주말까지 이어지는 축하로 자주 맥주집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노동 그 자체는 술을 마실 시회를 제공했다고 이 기록은 계속 불평하고 있다.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의 일을 갖게 되면 한턱을 내는 것으로 기대되었고, 승진 시에도 같은 의무가 기대되었다.

19세기 후반은 1850 이후의 민중 여가의 재건 이전의 “황량한 기간”이었다는 견해는 수정을 요한다. 커닝햄 박사가 지적하듯 그 기간은 오히려 왕성한 민중 여가의 성장의 기간인 측면이 있었다. Robert storch는 Joseph Livesey 같은 금주 개혁가들이 민중의 “도덕적 향상”을 위한 필사적인 필요를 보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빅토리아조 초기의 도시에서의 진정 풍성한 선술집 중심의 놀음과 운동들이 있었다는 것임을 암시했다. 다양한 다른 민중들의 indulgences가 없었더라면, 금주 개혁의 counter-attractive side는 그렇게 강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56. 처음에 감리교도들은 그들의 태도와 행위로 그들의 이웃과 구분되는 소수 문화를 대변했다. 그들의 활동은 예배와 부흥회와 모임과 철야와 찬양으로 예배당에 집중되었다. 19세기가 되면 그것은 소수문화로부터 광산촌에 눈에 띄는 특징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성장했다. 힘이 세지면서 감리교도들과 revellers 사이의 대결은 더욱 잦아졌다. 18세기가 끝나기 전에도 Sithney 감리교도들은 찬양을 불러 축제의 소음을 없애려고 하다 돌에 맞기도 했다.

19세기 초가 되면 감리교도들은 촌락 본거지에서 도시로 이동할 만큼 강해졌고, 축제처럼 시장은 대결의 장소가 되었다. Camborne에서 웨슬리언 목사는 1840년 시장터에서 예배를 열었다. St Austell에서 원시 감리교도들은 놀이가 있기 전에 캠프 모임을 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악의 성행을 막아주고, 안식일을 모독하는 관습을 없애달라고 열렬한 기도를 올렸다. 경기 감독 중 하나는 전도가 되었고, 경기는 열렸지만 좀더 떨어진 도시의 외곽 지대에서 열렸다.

절대 금주자들에 의해 counter-attractive 조처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광부들은 깃발과 막대기 뒤에서 행군을 했고, 그들의 목마름은 약한 차로 달래졌고, 흥분에 대한 그들의 필요는 유혹과의 힘든 싸움에 대한 열렬한 oral rendering 이 지배하는 모임에 의해 충족되었다. 감리교도와 낡은 민중문화의 오락 패턴 사이의 거리는 gentry 후원이 publican promotion으로 기울면서 넓어졌다. 반대는 이제 광적인 수준이 되었다. Penzance 모임에서 금주가들의 깃발은 선언했다: “8000명이 술주정뱅이들이 매년 죽고 지옥 간다.”

57. lower orders의 음주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시도가 이전에 있었다. 음주 퇴치 단체는 1850년 Redruth에서 형성되어 술을 금하는 법을 시행하고 밀고자에게는 보상하도록 local oficers of the peace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자들이 열등한 자들에게 sobriety를 강ㅇ하는 시도였다. 절대금주운동은 술집에 반대하는 캠페인에서 가난한 자들을 참가시켰다. 해리슨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절대 금주가들은 금주 모임을 대단한 고위급 사람들의 모임으로부터 노동자들로 하여금 선술집 유혹으로부터 차단시키는 counter-attractive 기능으로 변형시켰다. 이런 식으로 중산층과 노동자 ‘respectables'사이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1839년 절대 금주가들이 이끈 연례 축제는 이전의 행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역 신문은 1년전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교구는 광란과 술취함의 장소였다. 파멸이 네 모퉁이를 붙들고 있는 듯했다. 네 개의 술집과 12개의 맥주집이 있었다. 이곳에서 6000 파운드 이상이 매년 술 먹는 데 소비되었다. 현재는 다른 교구 출신이 아닌 한 이곳에서 술 취한 사람을 보는 일은 드물다. 그 돈의 1/4도 술에 소비되지 않는다. 술집에서 시간과 번 돈을 소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말쑥하게 옷 입고 예배의 장소에서 발견된다.”

밴드와 행렬의 흥분, 개인적인 참여 의식의 고취, 노동자 계급을 영웅이 되도록 초대하기( 적어도 그가 서명하는 순간 혹은 술로부터의 구제를 간증하는 동안) 등은 노동자들을 전통적인 오락과 이전의 낡은 삶의 패턴으로부터 떼어놓도록 의도되었다. 1841년 Camborne 과 Redruth 를 지나는 절대금주가의 일마일 거리의 행렬은 지역 사람에 의하면 “아주 볼만한 장면이었다”. 그는 Brewery 근방에서 같은 시간 열린 레슬링은 별로 출석률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2년 뒤 더 길고 더 웅장한 금주가들의 행렬은 야외 모임을 갖기 전에 Redruth를 배회했고, 뒤이어 지역 예배당에서 차를 마셨다. 차 마신 후 모임은 성공적인 하루를 마쳤다.
58. 1844년의 성령 강림절 주말 풍경 역시 이러한 모습을 재현한다. 금주가들의 모임 행사만 풍성.

1950년대 초 조직화된 기차 여행은 counter-attractions를 증가시킴.

1864년 외부인은 콘월 축제를 유감스런 광경으로 묘사한다. “술도 없고, sack races도 donkey derbys도 민중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대다수가 주일 학교와 관련된 수많은 차 마시기에 참여해서 더 큰 즐거움을 찾았다. 차 마시기는 다양한 행사로 열렸다. 예배당 보수나, 새 예배당 짓는다거나, 선교사 모임이 있다거나 등등”

59. 소박한 음식은 지적인 풍성함으로 보상 받았다. 연설가들은 많았고, 그들의 열변은 길었다. “레슬링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모임의 정신은 캠프 모임이나 금주 파티나 해괴망측한 차 마시기를 통해 출구를 찾았다.”

revelry와의 경쟁에서 종교적 금주 개혁가들의 성공에 대한 평가느 인상적임에 틀림없다. 이런 종류의 영향력은 쉽게 측정될 수 없다. 어쩌면 초기의 절대 금주의 “신기함”의 요소는 다소 시들었다. 사람들은 낡은 방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과 합류해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얼마나 빠르게 벌어졌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기함이 사라졌듯이 지역 신문의 금주 운동 보도 경향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까지 제공한 초상과 금주가들에게 실패의 쓴 맛을 보게 한 revellers의 예와 균형을 맞출 수 있다. 1845년 서부의 금주의 아버지로 알려진 성경 기독교인이었던 Thomas Trevaskis는 Padstow에서 revelry의 힘에 의해 패했다. 일년전에 그는 콘월 축제의 가장 오래된 축제인 Padstow Hobby Horse,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그 행사를 “소란, 음란, 일반적인 방탕함” 의 장소로 묘사했다. 그래서 그는 대신 살찐 수소를 앞으로 7년간 그날에 구워먹자고 제안했다. 5월 1일 그는 수소를 데리고 도시로 갔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분별한 여흥을 더 좋아했고, 돌을 던지면 그와 수소를 도시로부터 몰아냈다.

60. 이런 사람이 Trevaskis만이 아니었다. 다른 예들도 많다.

1843년의 금주단체 야외 모임에는 3000명이 참석. 일년 뒤에는 10000명이 참석.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몰려들자 이 기회를 잡아 술집들도 기구를 가지고 이동해와 술을 팔았다. 그래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이런 방해는 금주운동의 불완전한 성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 운동이 가한 진정한 충격에서 너무 많은 것을 빼면 안 된다. 많은 도덕 개혁가들은 이상하고, 대결의 사건들은 재미있을 수 있지만 오락 개혁가들은 진지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초점을 공동체로부터 개인으로 옮긴다면 내적인 심리적 갈등의 영역 속으로 들어온다. 쾌락과 저주 사이의 힘들고 고통스런 균형이다.


II
살펴보게 될 탄광 공동체의 삶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의 두 번째 측면은 감리교와 이전의 민중 종교(beliefs)와 태도의 관계다. 그들의 여가 시간을 지배하려는 기독교적 시도가 노동자 계급을 교회와 자주 접촉하게 만들었다는 해리슨 박사의 주장에는 지지할 만 한 게 많다. 그러나 민중 문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에는 위험이 있다. Gareth Stedman Jones는 살펴본 것처럼 노동자 자신들의 계급 표현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적 통제”의 관점의 위험을 강조했다. 감리교를 민중 문화의 성장에의 방해물로, 그리고 산업주의의 노동 훈련의 carrier로서 바라보는 데 익숙한 노동 역사가들은 감리교를 노동자 계급을 respectability로 만들기 위한 외적인 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틀린 관점은 아니지만 완전한 것도 아니다. 도시에서는 어쨌든 촌락의 감리교는 중산층의 지배를 전적으로 받은 게 아니었다. 금주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행동주의의 많은 측면에서 새로운 게 아니었다. 촌락의 감리교는 초기부터 지역 목사들과 계급 지도자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참여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지일학교 선생님들과 술집과 경쟁을 벌인 사람들에게 근면과 술 취하지 않음의 덕성을 인상깊게 만든 사람은 상류층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61. 콘월 지역에서의 금주 운동의 대단한 성공은 그곳이 오래 전부터 감리교 본거지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이미 주장했다. 왜 광부들 사이에서 감리교가 성공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검토하면, 그곳이 미신과 반지식주의의 어두운 지역이어서 다른 곳보다 전통적인 신앙의 형태와 행위들과 갈등을 덜 했기 때문이라는 게 드러난다. 서부 콘월 지역에서의 금주운동의 성공에 대한 전통적인 감리교 사료집은 진정한 초상을 왜곡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타락한 술주정뱅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험적 종교”의 혜택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욕하고, 간통하고, 술 마시고, 싸우고, 부수고, 밀매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등등. 그러다 존 웨슬 리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이 이제까지 메말랐던 콘월 사람의 도덕적 정신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편파적이다. 서부 콘월 지역의 평민들이 200년간 도덕적 문화적 진공 속에서 살면서, 자립과 확신을 가지고 운명의 부침과 거친 세상의 요구를 마주하고 술에서 망각을 찾고 무분별한 폭력에서 위안을 찾기만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들은 종교가 없지 않았다. 문맹이었던 촌락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는 종교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마술적인 믿음의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것에 따라 그들은 존재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했다. Obelkevich박사는 19세기 링컨셔 남부 노동자의 종교적 영역이 기독교를 넘어 이교도적 마술과 미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민중 종교는 교회에서 촌락으로 건너갈 때 각색되고 변형된 기독교 교리의 개념들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콘월에서 감리교가 빠르게 성장한 광부들과 어부들은 운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직업을 추구했다. 어부들은 바람과 조류에 의존할 뿐만 아니었다. 어떤 때는 그들의 생계가 결정되는 물고기 떼들이 충분히 몰려들지 않았다. 현물 지급배당 체제로 임금을 받던 광부들은 자기가 캔 광물의 가치에 따라 소득이 생겼다. 캐는 곳이 좋은 곳이냐 아니냐는 운이 결정했다. 광부와 어부들은 작음과 부상의 높은 위험을 직면해야 했다. 그들이 바다나 광산을 다스리는 힘을 땅이나 혹은 지상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닌 다른 힘들에 돌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어부들은 목사가 보트 근처에 나타나면 출항을 하지 않았다. 광부들은 땅 속에다 십자가 표시를 허용하지 않으려했다.

땅속 유령은 knockers로 알려졌다. 작은 요정과 관련되어 이들은 로마 시대에 광산에서 일한 유태인 유령이라고 말해졌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어서 그들이 받는 대접에 따라 운을 다르게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망치로 두들겨 좋은 광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적대감으로 취급한 사람들에게는 부상이나 죽음을 갖다 주었다. 지상에서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운의 부침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의 갈등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가끔 마녀가 포함되었다. 영혼을 불러내는 사람도 있었고, 모든 대장장이는 주술사였다. 어떤 시골의 목사들은 귀신을 때려눕히는 척 해서 민중 미신을 강화시켰다. 어떤 사람은 민중 미신의 유용성을 보았다. “미신의 쇠퇴는 사람을 아주 비종교적이게 했다.”

63. 좀 더 지적인 목사들은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이교도적인 이러한 민중 신앙에 적대적이었다. William Borlase 목사는 잃어버린 물건을 마술로 되찾겠다고 하는 교구민을 나무랐다. 그는 지하 세계의 위험한 신비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 것을 그에게 경고하고 마귀와의 모든 교제를 거부하도록 했다. 감리교도들이 능력을 하나님과 마귀에게만 국한시키고 1817년에는 그들이 광부들을 “상상력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러한 해방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추구되는 동안 많은 감리교 요소들이 민중 문화의 속으로 흡수되고 동화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감리교는 민속 신앙을 대체하기 보다는 종교적 어휘로 번역했다. 마술도, 영매도 사건을 설명할 때 상식적인 경험적 관찰을 배제했다. 바위가 떨어지는 시점에 그곳에 있으면 죽는 것을 가지고 . . .

64. 광부들의 잘 속는 성격은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 본질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가 새롭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들은 그의 설교에 반응할 수 있었다. 감리교는 그에게 환경을 충분히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되었다. 행운이 항상 선을 뒤따라오지 않았다. 신앙의 시험이 아주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악한 사람이 이 땅에서 거두는 보상은 죽은 후 기다리는 징벌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등등.

신의 손은 광부들의 변화하는 운에서도 있었다. 그가 잘하면 그의 노동을 축복하는 신의 섭리였다. 아니면 그의 신앙이 시험받고 있는 거였다. 등등.

65. 감리교 신학의 많은 측면의 삭막함은 그것으로 하여금 기존의 민중 신앙 속으로 섞여 들어가게 해주었다. 그 해설가들(interpreters)은 교육받은 웨스리들이 아니라 지역 목사들이고 class leaders 였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이들은 해설가로 간주되거나 혹은 신의 뜻의 대행자였다. 마치 마녀나 혼을 불러오는 사람이 어두운 힘을 작동시키는 agencies 인 것과 같은 거였다. 가장 간단하게는 지역 목사에게서 나오는 중재의 힘은 기도로 축제날 좋은 날씨를 가져온다는 것과 같은 믿음 수준일 뿐이었다.

66. 즉 기독교를 미신의 아류로 봄.

67.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귀신과 마녀를 믿었다. knockers 대신 마귀를 대체함으로써 감리교는 미신 대신 이성을 택하지 않았다. 감리교는 성공적으로 미신을 번역했다. 그러나 종교적 어휘의 승리는 감리교와 민속 신앙의 섞임의 기간 이후에 왔다. 감리교 미신은 평민 고유의 미신과 잘 통했다. 감리교 미신은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콘월에서의 match는 가장 강한 그들의 집회 중의 하나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정도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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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 콘월지역의 감리교와 민중신앙 <- 현재글

이순구
2009-03-01
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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