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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윌리암 모리스 발표--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작성자

이순구

작성일자

2008-08-16

이메일

leesoonkoo@yahoo.co.kr

조회

2692


How I Became a Socialist


영미문학연구회
근대분과 세미나
08년 8월 9일
이순구

1894년 6월 16일 Justice에 출판됨.

독자들이 날 a type of a certain group of people로 본다면 왜 내가 사회주의자로 변신했는지 역사를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자. 그것은 10년 전과 다르게 더 이상 확실하게 표현해주고 있지 않다. 내가 사회주의라는 용어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주인도 종도 없고, 게으른 자도 너무 일 많이 하는 사람도 없고, 두뇌로만 살아가는 노동자도 손으로만 살아가는 노동자도 없는 곳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조건에서 살아가고 낭비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한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사회의 조건이다. 궁극적으로는 commonwealth라는 단어의 의미의 실현이다.

정치적 급진주의의 기간: 나의 이상을 분명하게 의식했으나 그것을 실현하리라는 의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Democratic Federation 가입--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희망이었고,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그것을 위해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그러한 변화가 언제 다가올 것으로 믿었느냐 물으면 난 모르겠다. 나는 희망을 재려들지 않았고, 그것이 가져다 준 기쁨도 그랬다. 그 당시 난 경제학을 전혀 몰랐다. 애덤 스미스도 리카르도도 막스도 읽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밀의 글들을 읽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Fourierist guise의 사회주의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 글들에서 논의가 명료하게 정직하게 제시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란 필요한 변화고 그것을 우리 시대에 실현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점을 날 설득했다. 밀의 글은 내가 사회주의로 전환하는데 finishing touch를 해주었다. 가입 후 나는 사회주의의 경제학적 측면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막스도 읽었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데 자본론의 역사 파트는 즐겨 읽었지만 순수 경제학 파트를 읽는데는 괴롭고 당황스러웠다. Bax, Hyndman, Scheu 와의 대화도 당시 있었던 propaganda 미팅에서도 많은 걸 주워들었다. 그 뒤에는 무정부주의자 친구들로부터 내가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밀에게서 배운 것처럼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무정부주의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상이 나로 하여금 실제적인 사회주의를 찾아보도록 강요했다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상을 conceive하도록 만들었나? 여기서 내가 앞에 말한 a type of a certain group of mind가 나온다.

근대 사회주의 등장 이전에 모든 지식인들은 거의 다 금세기의 문명에 만족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처럼 만족했고, 야만 시대의 남아있는 우스꽝스런 잔존물을 제거함으로써 문명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 외에 달리 할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즉 이것은 부유한 중산층에게 자연스러운 Whig frame 이었다. 기계 진보에 관한한 이들은 단지 사회주의가 그들의 풍요를 즐기도록 가만 놔두면 더 요구할 게 없었다.

그러니 이들 만족한 자들 옆에는 진정 만족하지 못한 다른 자들이 있었고, 문명의 승리에 역겨운 감정을 갖는 자들이 있었으나 수많은 Whiggery 세력에 의해 침묵 당했다. 공개적으로 이런 Whiggery에 반항했던 자들이 소수 있었다. 두 사람만 말하자면 카알라일과 러스킨이었다. 러스킨은 내가 실제적인 사회주의자가 되기 전에 앞에서 내가 말한 이상을 향한 스승이었다. 회고하건데, 20년 전에 러스킨이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지루하고 죽음과 같았을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불만에 형태를 부여하는 법을 매운 건 그를 통해서였다. 당시 나의 불만은 분명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생산해내고자 하는 욕망말고 내 인생의 주요한 열정은 근대 문명에 대한 혐오였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것이 사회주의에 의해 대체되는 것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문명이 mechanical power를 지배하고 낭비하는 것에 대해, 문명의 보잘 것 없는 commonwealth, 삶의 비참함을 위한 문명의 엄청난 조직력에 대해 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문명의 어리석음만 없다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소박한 쾌락에의 경멸, 노동의 유일한 위로인 예술을 파괴시킨 문명의 천박성, 지금처럼 그때도 이 모든 것을 느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과거의 희망은 사라졌다. 오랜 세월 인간의 투쟁은 이 조잡하고, 목적 없고, 추한 혼동만을 만들어냈다. 문명의 추함이 이 세상에 오기 이전인 날들의 마지막 잔존물을 다 휩쓸고 가버림으로써 현재의 모든 병폐를 더욱 강화시켜 갈 것만 같은 게 나의 코앞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것은 진정 나쁜 전망이다.

이 모든 문명의 더러움 속에서 위대한 변화의 씨앗, 소위 사회 혁명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게 떠오르지 않았다면, 난 이런 염세주의의 끝에 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국면이 그 발견으로 인해서 변했다. 그 당시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 내가 해야만 했던 모든 것은 실제적인 운동에 나 자신을 묶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요약하면 당시 역사 공부와 예술에 대한 사랑이 중단되지 않으면 역사를 몰상식으로 바꾸고 예술을 현재의 삶과 관련 없는 과거의 호기심 주는 물건들의 collection으로 만들어 놓을 문명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혐오스런 문명의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는 혁명에 대한 인식은 한편으로 진보에 반항하며 그저 소리질러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고, 또한 사이비 중산층 예술가들이 더 이상 뿌리가 없는 데 예술을 성장시키려는 희망에서 만든 수많은 schemes 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난 실제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두 마디. 우리가 역사와 예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고 물을 것이다. Social Democracy란 말로 우리는 decent livelihood를 얻고자 한다. 예술과 교양이 칼과 포크 앞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예술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뿌리가 번영되고 걱정 없는 곳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명은 노동자를 아주 말라비틀어지고 가여운 존재로 축소시켜 지금 강요당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을 알 수 없다. 그의 앞에 충만하고 합리적인 삶의 진정한 이상을 정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이다. 거기서는 미의 지각과 창조, 진정한 쾌락의 향유 등이 일상의 빵처럼 필요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단순한 반대에 의한 것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없어져야 한다. 극도로 저항해야 한다.


Useful Work Versus Useless Toil


모든 노동이 유용하고, 모든 노동은 바람직하다고 오늘날 생각들 한다. 쓸모없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게 뻔해도 그것으로 생계를 벌고 따라서 취업이 되었다고 여긴다. 노동이라는 신성한 명분을 위해 모든 쾌락과 휴일을 희생시킬 정도로 “부지런하면” 대부분의 잘 사는 사람들은 그 노동자를 축하하고 치하한다. 다시 말해 모든 노동은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게 근대 도덕의 율법 조항이고 타인의 노동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편리한 신조다. 그러나 노동하는 자에게 말하건데 그 말을 믿지 말라는 거다. 좀 더 사태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우선 인간이 일을 하든가 혹은 멸망하든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자. 자연은 우리에게 먹을 걸 공짜로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정도 노동을 해서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이 우리가 이러한 노동을 해야만 하는데 대한 보상을 해주는지 보자. 확실히 자연은 개인과 종족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행위들을 견딜만하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기 때문에 병들지 않은 경우 그의 노동에서 쾌락을 취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을 위선적으로 칭찬하는 경향에서 우리는 축복이 아니고 저주인 노동이 있으며 노동자가 거부하는 게 나은 노동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두 종류의 노동이 있다.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이다. 전자는 축복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 인생을 가볍게 해주는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에 짐이 되는 저주다.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희망이 있고, 다른 하나는 희망이 없다. 전자는 해야 하고 후자는 거부해야 옳다.

그렇다면 노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희망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휴식에의 희망, 제품에의 희망, 노동 그 자체에 대한 쾌락에의 희망.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많고 질이 좋길 희망한다. 휴식은 충분하고, 가질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좋은 것,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 노동하는 도중에 의식할 수 있는 충분한 쾌락. 휴식의 희망을 맨 처음에 놓았는데, 그것은 우리 희망의 소박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휴식은 즐길 만큼 충분히 길어야 한다. 피로를 회복할 정도만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용하고자 원하는 제품에의 희망. 노동 그 자체에 대한 쾌락에 대한 희망. 노동하는 사람은 그의 정신과 영혼을 몸과 마찬가지로 사용한다. 이런 에너지의 움직임에는 쾌락이 있다. 따라서 가치있는 노동이란 휴식에 대한 희망, 만들고 있는 제품 사용에 대한 쾌락에 대한 희망, 일상적인 창조적 기술의 쾌락에 대한 희망 등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 외의 노동은 무가치한 노동이다. 그것은 노예의 노동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를 재보자. 수 천 년의 노동, 그렇게 많은 약속이 지연되고, 문명의 진보와 자유의 획득에 그렇게 많이 기뻐한 후에 우리가 하고 있는 노동 말이다. 문명 가운데 행해지고 있는 노동과 관련해서 가장 쉽게 주목할 수 있는 첫 번째는 그것이 다른 계급들 가운데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이다. 1. 노동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 하는 척도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2. 충분한 안락과 휴일이 있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3. 일만 하는 사람들, 노동자 계급이 있다. 이들은 중산층과 귀족과 구분되는 계급이다. 이러한 불평등이 노동계급을 무겁게 짓누른다. 적어도 휴식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들판의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만든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유용한 노동을 쓸모없는 노동으로 만드는 시작일 뿐이다.

첫째, 일하지 않는 귀족 계급을 보자. 생산하지 않으면서 소비만 한다. 그들은 노동하는 자들을 희생하면서 유지되어야 한다. 거지처럼 이들은 공동체에 짐이 된다. 오늘날 이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현재 체제의 폐해를 깊숙이 들어다 볼 수 없어 이 짐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

상인, 제조업자, 전문직 종사자 등 중산층과 관련해서는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처음엔 공동체를 도와주고 짐이 되는 거 같지 않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대부분은 일하지만 생산하지 않는다. 상품 분배나 의사나 예술가나 문인들이나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경우 생산할 때에도 이들은 부당할 정도로 소비한다. 상인, 제조업자들은 가장 강력한 집단인데 노동자들을 강요해 공급받는 그들 각자의 부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끼리 싸우며 삶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나머지는 이들에게 기생한다. 이들은 대중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특권 계급이다. 변호사들의 경우처럼 부에 기생하는 자들이다.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은 유용한 척하지만 어리석음과 사기와 전제주의의 지지자들로서만 유용하다. 이들은 모두 한가지 목표만 있다. 유용한 물건을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자리를 자기를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에 짐이 되는 자랑스런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이들은 노동 그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또 다른 계급이 있다. 생산은 거의 안하고 소비는 굉장히 많이 하기 때문에 주로 생산자들에 의해 supported 된다. 군인들, 집안 하인들, 사무원, 상점 보조원 등은 중산계급의 일인 부를 위한 사적인 전쟁의 봉사자들이다. 이들은 생각보다 큰 집단이다.

다음으로 생산하지 않는 돈 많은 계급의 존재의 결과로 어리석고 사치스런 물건들--타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요구하지 않을 것들--을 만드는데 고용된 수많은 민중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부라고 부르길 거부한다. 이건 부가 아니라 쓰레기다. 부란 자연이 주는 것이며 합리적인 사람이 합리적인 사용을 위해 자연의 선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다. 햇빛, 신선한 공기, 지구의 얼굴, 음식, 옷, 집, 모든 지식 축적, 그 지식의 보급,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예술 작품,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 창조하는 미, 자유롭고 사람답고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쾌락에 봉사하는 모든 것들이 이것이 부다. 영국 상품을 보면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욕망하지 않을 수많은 상품들을 생각해보라. 쓸모없는 노동이 만들어내는 것들 말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더욱 슬픈 industry가 있다. 만일 사람이 생산하지 않고 산다면, 아주 공허하고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 노동자로 하여금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부양하는 자들로부터 임금을 받으며 살기 때문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물건들을 사용하기 위해 얻을 수 없다. 형편없는 음식과 mdlqhr과 집으로 비참하게 살아가야 한다. 임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스꽝스런 물건들을 붖들을 위해 만들어내야 한다.

값싼 물건은 근대 제조업자들이 의존하는 착취제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노예로서 즐겁게 해줘야 할 수 많은 노예를 포함한다. 그들의 일상적 삶은 노예제품을 만들도록 강요하며 그 물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노예상태를 영속화시키는 거다.

문명 국가들에서의 노동과 관련해 요약하자면, 문명국가들은 세 개의 계급으로 구성된다. 일하는 척도 안하는 계급, 일하는 척 하지만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계급, 일은 하지만 종종 비생산적인 노동을 하도록 두 개의 계급에 의해 강요받는 계급이 있다.

따라서 문명은 그 자원을 낭비한다. 현재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그렇게 할 것이다. 이건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전제주의를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말인가.

지난 200년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거의 완전했다. 그럼 지금 옛날 사람들보다 우리 모두가 부유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민중은 가난한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들에게 문명은 자연이 금하는 욕망을 갖도록 했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의 열매는 도둑질 당했다. 그리하여 휴식과 소득과 쾌락을 희망하며 노동하도록 했던 자연에 의한 충동(compulsion)은 노동하기 위해 살아가는 희망으로 노동하는 인간에 의한 충동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1. 우리는 근대사회는 두 개의 계급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특권계급이었다. 이 계급은 다른 계급으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하고 열등한 이들 계급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빼앗고 자기들 계급의 사람들을 우월한 위치에 유지시키기 위해 빼앗은 부를 사용한다. 이들은 단지 열등한 계급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만 할 뿐이다. 그들은 열등한 계급의 노동력을 진정한 부를 창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쓰레기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대규모로 낭비한다. 소수의 강도짓과 낭비가 다수를 가난하게 만든다. 가진 자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조처는 이들 계급을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노동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소비하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 즉 각자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해야 한다.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사회가 건립된다. 그것은 평등한 조건에 의존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고통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세워지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사회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노동에 의해 적당한 몫을 챙긴다는 희망과 적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노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모두 생산하고 쓸모없는 노동이 없어질 경우 그렇다면 위의 두 가지 희망은 확보되는 셈이다.

2. 이처럼 인간의 전제주의에 의한 강요를 폐지시킨다 해도, 자연의 필연에 의한 보상을 나는 요구한다. 노동이 강제적인 한 그것은 매일 짊어져야 할 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쾌락을 감소시키지 않고 우리의 부를 늘려가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이 우리 삶의 쾌락의 일부가 되어야만 자연이 정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강요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첫 번째 조처는 적어도 우리를 이러한 행복한 결말로 가는 길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세계는 소수에 의해 지탱된다. 모두가 노동을 하게 되면 각자 해야 할 노동의 양은 줄어든다. 그렇다면 노동력은 남게 되고 원하는 만큼 부유해질 것이다. 사는 게 쉬워질 것이다. 혁명이 사는 게 쉽게 만들고 모든 인간이 함께 노동하고 노동자의 시간을 빼앗는 자도 없고, 그런 미래의 시간이 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남은 우리의 노동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부, 이러한 자유로부터 우리가 사용해야할 첫 번째 것은 우리의 노동을 모든 이들에게 즐겁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고와 시련들에 맞서 삶을 행복하게 할 한 가지 길은 삶의 모든 디테일에서 재미난 흥미를 갖는 것이다. 근대 문명은 그것을 금지한다. 문명은 가난한 자들의 삶을 조야하고 끔찍한 디테일로 둘러싸며, 부자들에게는 기계적이고 공허한 삶을 강요한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고 느끼고 또 여러 작은 사건들 가운데의 우리들 삶의 노정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사려 깊게 주목하고 위대한 인류 전체를 세워가는 휴일이 얼마나 드문가.

그러나 우리가 우리들의 노동을 합리적이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전체적으로 휴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해야 한다. 어정쩡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우리의 기쁨이 없는 삶과 쫓기는 짐승 같은 삶처럼 두렵고 근심 많은 삶이 현재의 특권계층의 이익을 위한 생산 체제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임금과 자본 체제하에서는 공장주는 모든 사람의 몸에 내재된 노동력이 생산을 위해 이용되는 자본을 독점해 특권이 없는 자들의 주인이 된다. 이후 막스 이론과 같음. 공장주는 자기한테 유리하게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되고 자기의 자본의 키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며 그에게 예속된 노동자는 노예처럼 그에게 예속당한다.

3. 다른 경우 이 체제로부터 초래되는 다른 폐해들을 제기할 수 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현 체제하에서는 매력적인 노동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과 이 강도짓 (다른 표현이 없다)이 문명 세계의 노동력을 낭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한테는 유용한 것을 하지 않게 하고, 유용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힘든 과로한 노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공장주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노동력을 수단으로 상품이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일단 이해하라. 그 부가 진정한 거냐 가짜냐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게 팔려 이윤을 남기는 거 그러면 된다. 부자들은 자기네가 합리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어서 가자 부를 사기 때문에 그쪽에 낭비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만들 가치가 있는 물건을 못 사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낭비가 있다. 그래서 자본가가 제공하는 수요는 가짜 수요다. 그가 파는 시장은 자본과 임금 체제의 강도짓에 의해 만들어진 비참한 불평등에 의해 채워져 있다.

4. 따라서 우리가 무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고 유용한 노동을 확보해주기 위해서는 확고히 이 체제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노동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조처는 땅, 기계, 공장 등의 자본을 공동체의 손에 넣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해서 우리는 이윤 시장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하지 않고 각각의 진정한 수요를 공급하도록 모두 노동하고 이윤을 위해서 노동하는 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 노동할 것이다.

이런 첫 번째 조처가 취해지고 행복한 날이 오면 우리는 낭비의 짐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그 결과 합리적인 한도내에서 살아가도록 해줄 노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필수품들이 노동력의 낭비가 없는 공동체에게 쉽게 공급되고 그러면 우리는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할 여유도 있고, 너무 지나치게 에너지를 혹사시키지 않고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한다. 시간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첫 번째 것은 노동의 매력이다. 이것을 위해 무거운 희생이 필요하진 않다. 그러나 희생이 약간 필요하다. 한편 근대 삶의 장식적 부분은 이미 중심까지 썩었다. 새로운 질서가 실현되기 전에 그것은 없어져야 한다. 상업주의의 전제주의로부터 벗어난 자의 열망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게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삶의 장식적인 부분을 기꺼이 행하는 노동을 기반으로 해서 그리고 우리와 오리 이웃을 그것으로 이롭게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세워나가야 한다. 우리가 해야할 그렇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은 우선 매일 작은 부분을 취해서 너무 힘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날의 반복적인 임무고 따라서 견딜만 하지 않다면 우리의 나날의 쾌락을 방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노동은 진부한 노동이라 하더라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이에 대한 대답이 이 논문의 나머지다. 이 질문에 대한 몇 개의 힌트를 주자면 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제안들에 동의할 것이지만 몇 사람은 어떤 것은 이상하고 또 모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도그마화의 의도로 제안된 것은 아니고 단지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1. 노동은 매력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유용한 목표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2. 낮 시간의 노동이 짧아야 한다.
3. 노동의 다양성이다. 교육은 이를 위해 변해야 한다. 모든 능력을 돈버는 데 복종시킬 게 아니다. 개인에게 소질이 있는 것을 찾아내 handicraft 등 적합한 것을 가르쳐 줘야 한다. 재능과 천재성을 질식시키지 않고 발굴해 일상적인 삶을 즐기고 쉽게 느끼도록 해야 한다. 상업주의로 인해 민중예술이 사라졌고 장인계층이 소멸했다.
4. 쾌적한 노동 환경: 이윤 추구의 현장에서는 이게 확보될 수 없을 것이다. 공장도 지적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바꿔야.

14쪽: 노동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그럼 그렇게 노동이 세련된다면 제품 값이 아주 비싸지 않겠느냐는 반문이 나온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노동을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는 노동시간을 줄일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아리가 새로 얻은 자유 조건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전체 공동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우리들의 삶의 기준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평안을 희생시키는 데 만족해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삶의 기준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평안을 자유롭게 희생하는데 서로 경쟁해야 한다. 모든 이들을 위한 장식품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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