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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ris 08년 7월 발제 postscript76

작성자

조애리

작성일자

2008-07-13

이메일

ailee@kaist.ac.kr

조회

2937


Postscript: 1976

모리스의 시와 산문에 대한 비평 실망스러움. Jack Lindsay와 John Goode 말고는 인상적인 비평가 없음.

새로운 전기로는 Paul Thompson-포괄적/ Philip Handersdon 새로운 사실 밝혀진 것은 Janey와 Rossetti의 관계 그러나 모리스의 정치적인 사상과 행동에는 섬세한 관찰 부족/Rosalie Glynn Grylls는 로제티 전기에서 모리스를 남자답지 못한 비웃음의 대상으로 그림. 그러나 모리스가 빅토리아 시대의 “wronged" husband 역할하지 않은 것은 그로서는 명예의 문제였다.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연구: Tom Mann에 대한 Dona Torr의 연구와 Tom Maguire에 대한 나 자신의 연구 /페비언 협회에 대한 연구/ 쇼의1880년대 사회주의 프로파갠더 활동.

자신의 연구에 대해 1) quarry of Information 2)맑시즘에 의해 훼손된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다르게 생각. 낭만적 전통과 그것의 변형 ... 이 책은 냉전이 최고조일 때 출판. 나의 주장의 속류성은 당대의 정통 반 맑시즘의 속류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함.
Willard Wolfe: 맑시스트로서 misguided./ J.W. Hulse Revolutionists in London : 모리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Kropotkin 및 공산주의-무정부주의자의 영향을 많이 받음을 밝힌 것은 정당하나, 반 맑시즘적 정서로 자신의 논의를 망침. “모리스의 사회주의는 중세와 러시아 허무주의에서 빌어온 catholic적인 것”이라고 함. --> 그러나 모리의 사회주의가 무엇이었냐를 밝히는 것이 중요.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페비언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 다른 한편으로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반대. Hulse는 맑시즘의 상투형을 모리스에 가져다 댐.
Stanley Pierson: 1880-90사이의 영국 사회주의 내부의 지적 경향 연구. 영국에서의 맑시스트 사상은 영국의 지적 전통(공리주의, 비국교도, 카알라일과 러스킨에 의해 매개된 낭만주의 전통)에 기반하여 작용. 페비언주의와 Hyndman의 맑시즘은 공리주의로 돌아갔고 모리스는 맑시즘과 낭만주의 전통의 불완전한 통합. <-->1880-90의 노급운동과 사회주의이론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것은 공리주의나 낭만주의나 Nonconformity가 아니라 노동당주의. 이미 계급 정신 뿐 아니라 그 자체의 조직형태와 전략을 지니고 있던 노동당주의. 지적인 사유나 동화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논해야 하나 이를 생략하고 있다. 동화의 예로 페비언주의와 S.D.F.의 맑시스트 들고 있으나 (경제인이라는 개념 공유), 페비언주의에서는 이를 임대료, 가치, 국가, 역사, 침투전략과 동일시하고 있으나 S.D.F.는 계속 혼란스럽기는 하나 혁명적 사회주의 당파이론 주장. 사상을 전수와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이런 사상들이 실제 맥락(Bloody Sunday, 광부들의 파업, 수단 전쟁, 신조합주의 등 심각한 계급갈등)의 실제 사람들이 가졌던 것이고 현재에도 할 일이 있는 것으로(노선을 따라 전수된 것이 아니라). Pierson의 저작은 정치에 대한 감이 없다. Pierson의 주장과는 반대로, 모리스의 경우 중요한 사회주의적 개념이 낭만주의적 비판 위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그것과 통합되었으며 이전의 전통과 단절되어 새로운 변화를 알린다. 또한 낭만주의적 전통이라는 것도 모리스를 주관주의나 관념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아주 다른 성격의 자원을 포함하고 있고 그로인해서 맑스나 엥겔스의 저작과 독립하여 이런 변화 가능.

Meier는 모리스를 정통 맑스주의자로 제시. 이 정통은 맑시스트-레닌주의의 영향받은 것. 모리스의 저작에서 엥겔스의 영향 찾으려고 함. 변증법적 역사의식의 A Dream of John Ball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나선형 모델은 Bax의 영향<--> 이런 식의 체계화에서 진정한 dynamic이 상실. 이런 점에서 “Anti-Scrape" 중요. 모리스의 새로운 역사의식. 784인용. 그가 맑스에게 빚진 바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구체적으로 “공장 시스템”의 공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

나는 Pierson 식으로 맑시즘적인 개념이 모리스의 낭만주의에 superimposed 되었다는 입장도 Meier 처럼 맑시스트가 되기 위해 낭만주의라는 허울을 벗어야한다는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 모리스의 생각은 “Marx transforming Romanticism" 모리스는 맑시즘으로 개종하면서 하나의 접합점을 제공했으나 맑시즘 쪽에서 이에 상호작용을 하지 못함. Miguel Abensor와 John Goode가 나의 입장을 발전시킴.

Abensor 는 정통 맑시즘 쪽에서는 모리스의 사상 중 정통에 흡수될 수 없는 면을 무시. 맑시즘에서 Utopian Socialism 비판하다보니 교조주의적인 모순: Science(good) vs. Utopianism(bad). 1) 맑스 엥겔스가 1850년대 이전의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했다고 하더라도 지역 정치를 판단하는데 있어 유토피아적 양식을 반드시 비판할 필요는 없다.2) 관습적인 맑시스트적 접근에서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요소가 과학적 사회주의로 환원되었다고 본다. Meierdml 예. 이에 대해 억압과 길들이기의 조합으로 본다. 그의 입장은 1)과학적/유토피아적 모순을 거부 2) 1850년대 유럽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도 유토피아적 저작있다. 모리스는 맑스의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유토피아적 도약을 했다. 모리스는 fantasy라는 형식 속에 대안적 삶의 방식 속에서 보여지는 대안적 가치를 담고자했다. 개방적이고 사변적임. 상상력은 정확한 개념 정의에 거리를 둠. 모리스는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 고유의 새로 발견한 공간 즉 욕망의 교육이 중요.
791 2행부터 인용문까지

모리스를 사회주의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맑시즘 자체에 대한 자아비판 필요. 도덕적인 의식의 결핍, 욕망의 어휘 부족, 미래의 이미지 투사하지 못하는 무능력, 테제 대신에 공리주의자의 지상낙원에 기대는 것- 경제성장의 극대화.

Goode는 윌리엄스의 판단에 대해 창작을 가치절하한데 대해 문제 삼는다. 톰슨에 대해서도 미학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리스의 창작을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사회주의자 시절의 창작은 “ 이론적으로는 풀 수 없고 은유로만 풀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형식적 대응” 이런 점에서 Goode는 Pierson과 유사하다. “모리스가 낭만적 비전과 맑시즘을 융합하는 가운데,” 그 한 결과로서 “의식과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분리를 강화했다.이것은 러스킨과 카알라일의 사고의 특징이기도 했다.”자본주의 과정의 결정론에 대한 모리스의 이해가 깊어지면 질수록, 이런 열망이나 “욕망”에 대한 항의가 더 커지고 “욕망”이 “필연”을 정복할 필요가 더 커졌다. 구드는 모리스가 비전보다는 절망으로 인해 혁명적 사회주의로 옮아갔다(235)고 본 점에서는 나와 같은 견해 이다. “그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요개념은 처음부터 소외였다”(236) 구드는 모리스가 이런 처방을 의식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문명은 만족을 금하는 욕망을 낳는다. 그리하여 문명은 단지 niggard가 아니라 고문자이다.” 모리스는 사회주의 미래의 비전에 의해 생긴 긴장 속에서 이러한 모순을 본다. 그의 저작(구드는 후기 창작의 진정한 주제라고도 한다) 속에서는 “ 역사적 잠재성의 비전”과 운동의 음울한 일상적인 실제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된다. 사회주의적 열망과 압도적인 자본주의의 실제 모습 사이의 모순에 직면했을 때, 맑시즘 전통 내에서 일반적인 반응은 기계적인 운명예절설이다. 모리스는 점차 그런 결정론이나 진화론을 의심했을 뿐아니라 그것이 또한 소외의 문제에 대한 가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그의 작품은 ” 결정되는 그리고 결정하는 역사적 실제와의 관계에서 창조적인 정신이 그려질 수 있는 양식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며 큰 성공을 거둔 시도이기도 하다“(222) 그리고 사람들 자신이 “결정되는 힘일 뿐아니라 결정하는 힘임을 보여준다”(271)

구드의 모리스 옹호가 빛나는 곳은 개별 작품에 대한 꼼꼼한 비평. Sigurd the Volsung/ A Dream of John Ball / The House of Wolfings

News from...에 대하여 Scientific도 Utopia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과학적 유토피아란 단어에 도전. 이 작품이 “가치가 실행된 모습을 그린 것이기보다는 현대생활에서 거부된 가치의 역전”이며 저자의 마음속에 있는 심한 피로감 나아가 비관을 표현한다. :“Nowhere is nowhere except as a conceptual antithesis in the mind of an exhausted activist."
하지만 대안을 행하지 않고 현재의 가치를 거부할 수 있을까? “antithesis"에 중점이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Nowhere의 가치는 비 현재 가치이자 반현재의 가치이다. 그것들은 ex nihilo로 대담하게 상상되지 않았는가? 구드가 하는 일은 내 자신이 1955년에 그랬듯이 유토피아주의를 타당한 상상적 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오직 한가지 요소 (미래, 과거, 현재의 끝없는 대조)에 집중한다.

797인용

모리스가 “혁명적 정신이 느끼는 긴장들을 극화하는 형식을 발견했다”이것은 부분적으로 진실이며 John Bull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News..를 단지 “고뇌”로만 읽어야 하나? 이것은 대안적 가치를 행하는 작품을 너무 머리로만 읽는 거이 아닌가?

구드는 자신이 제시한 증거와 다른 결론. 그렇게 된 것은 유토피아주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98(270)인용
이 인용에서 구드는 유토피아주의를 복구.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고 약간 회피. convention, insight, in the conscious mind, knowledge. 예술을 지성화하려는 경향.
798(261)인용. 여기서 구드는 유토피아적 비약이 엿보인다. 필연의 왕국에서 상상 속의 자유의 왕국으로 비약. 거기서는 욕망이 실제로 선택을 뜻하고 욕망이 욕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적 텍스트로만 보았다.

Morris/ Marxism의 문제: 모리스를 노동당주의나 페비언주의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는 오래전에 저지당했다. 노동당주의는 그의 관점과 동떨어진 것일뿐아니라 현대의 노동당주의는 정확하게 그가 예언한 전반적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노동당주의는 원내투쟁에 집중하고 새로운 사회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원외의 조직을 지지해주지 못한다. 그는 과도기적인 상태에 이르게 할 실험들에 대해서 이야기.
말년의 모리스는 노동당주의의 길의 불가피성과 화해. 그러나 마지막 강연에서 이런 개선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그리고 마침내 공산주의로 가는 직접적인 길에 들어서는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멈출 것이라는 데 대해 계속 문제제기.

800의 마지막 인용
여기서 대안적 개념들 제시. 경쟁사회에서의 기회균등 :그리고 동등한 사람들의 사회, 즉 사회주의 공동체란 개념 제시. 갑자기 과학보다 유토피아주의가 더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모리스를 지적인 인물로 볼 경위 그는 소외에 대한 처방을 멋지게 진단. 도덕주의자의 구체적인 인식을 통해 그리고 영국의 문화 전통이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소외를 진단. 영국노동 운동이 현재 교착상태에 빠졌다면, 그에 대한 관심 되살릴 필요가 있다.

평등을 중시 (페비언주의에서는 수단을 앞세움)/ 계급 사회의 부정. 기저의 함축적인 은유는 낭만주의의 공리주의 비판. 즉 유기적 이미지. 자연스러운 삶의 성장이 인위적인 문명의 구속에서 자유로워 질 것이다. 공산주의의 성취는 도덕적인 인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 철폐로 인한 공동체적인 가치-체계의 성장. Nowhere에서 삶의 습관을 강조. 훔치지 않고 사는 것이 편안해짐. 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두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조직에 의해 지지되고 그를 지지함.

모리스는 자본주의 사회비판에서 도덕을 부차적으로 보고 생산관계를 일차적으로 보지 않음. 도덕적 타락이 내재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회적 형태 속에 있다는 뜻. 경제와 도덕은 체계화된 사회관계라는 같은 연계 안에 있고 이 연계에서 경제적 그리고 도덕적 논리가 나온다. // 미래 사회에서도 욕망과 공리주의적 결의 사이에 분쟁은 계속될 것이고 욕망이 우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는 현재가 파멸할 운명임을 안다. 이 지식은 실천적 사회주의자로서 얻은 것. 그러나 욕망은 지식에 앞선다.
805 인용.

필연에 의해 노동자들이 투쟁을 할 수는 있지만 이 투쟁의 목적이 욕망과 욕망의 성취를 위한 전략에 의해 자리매김되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더욱이 사회주의자들이 욕망의 교육에 실패한다면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가짜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기존사회가 이를 마련하지 못하고, 모두를 필연의 손에 넘긴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재난일 것이다. 욕망이나 욕구의 교육이 선행되어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과학이 무엇을 욕망하고 어떻게 욕망할 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모리스는 people이 원하는 바를 발견하고 더 원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사회주의자 즉 자신의 의무라고 보았다.

모리스의 낭만주의를 카알라일의 반동적인 “봉건적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러스킨의 ”고딕의 성격“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의 낭만주의의 궤적은 키이츠의 주관적인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기네비어 옹호>에서 보이는 고양된 반역을 거쳐 <지상 낙원>의 절망이라는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고나서 Icelandic saga라는 사회적 신화의 치유를 거쳐 사회주의라는 결말에 이룬다. 이런 궤적은 두 양상1)시에서는 이것이 단편적 암시적으로 나타나나 결코 성취되지 않음. 2)열망이 성취. 젊은 시절의 낭만적 반역은 사회에 대한 개인적 감성의 반역이 아니었다. 그는 전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방식(”미, 역사, 로망스의 혼합물‘)에 열정적으로 사로잡힘. 그의 낭만주의를 규정해주는 것이며 후기에는 이 느낌과 역사의식 동일시.
809인용
현 사회의 실제 모습을 더 암울하게 보게 된다. 과거의 가치와 유물 모두 파괴될 운명. 이것이 초 중기의 비관주의 키움. 이때는 절망의 시기. 결국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는 과거를 현재의 일부로 만드는 힘을 재전유하고 그것을 상상의 미래로 확대했다. 과거의 열망이 새로운 의미와 결합된다.“과거가 밝게 빛나고 내게 다시 살아난다.” 현재에 대해서는 “나는 희망을 재지도 않고 그것이 가져온 기쁨을 재지도 않는다. ” 열망이 미래로 확대되자 죽음에 관한 오랜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는 사회를 상상할 때“어떻게 그들이 살 것인가?”가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살 것인가?”를 묻는다. 궤적은 완성되었다. 변화된 것은 그의 전통 뿐아니라 그의 인격과 감성. 모리스는 새로운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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