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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07년 10월 세미나 발제문

작성자

김재오

작성일자

2008-02-11

이메일

byron5@dreamwiz.com

조회

3103


순서가 바뀌었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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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연 근대문학분과 2007년 10월 세미나 발제문
발제자: 김재오
E. P. Thompson, William Morris: Romantic to Revolutionary

Chapter Ⅲ. "Love is Enough”

1871년 모리스는 그의 다음 시인 Love is Enough(LE)를 작업 중이었는데, 이 시는 로제티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미덕이 거의 없다. 감미로운 우울의 정조를 띠고 있는 이 시는 그 구조의 기술적 복잡함 때문에 때로 상찬받지만, 그것은 대체로 말해 기계적인 것이다. 인물들은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감상적인 시골뜨기들을 제외하면 The Earthly Paradise(EP)에 등장하는 유령들의 유령들일 뿐이다. 쉬운 리듬으로 쓰여진 “극적인” 대목들의 긴 시행들은 감정의 치명적인 무기력함과 사유의 공허함이 배어있다. 내러티브 자체도 실체가 없다. 사건 및 상황 혹은 관계의 특정성과 유리되어 수사나 상투적인 어법이 반복되는 분위기(mood)의 시가 되고 만다. 따라서 모리스의 창조성이 가장 고갈된 시점을 반영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기본 충동은 세상이 사고파는 상업적 윤리에 지배될 때, 삶의 가치는 개인적 관계, 즉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솔직한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주장일 뿐 신념이 실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 “사랑”은 인간관계로 제시되기 보다는 무기력한 갈망이나 감각의 침전, 의지의 약화, 한마디로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이끌림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시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죽음에 대한 열망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모리스가 의식적인 사유에서 중요한 몇몇 사실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경험을 설득력 있는 예술로 변모시킬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표피적인 주제는 사랑일지 모르나, 잠재적인 주제는 무의식과 죽음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이 시(LE)는 볼품없는 작품이지만 모리스 개인적 삶과의 관련성은 중요하다. EP에 나오는 시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도 사랑의 실패, 즉 진정한 믿음과 친밀함에 바탕한 관계의 실패이다. 이런 시들은 기이한 감동을 주기도 하고 이미지들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신념을 전달하고 있지만, LE에서는 이런 시들을 찾아볼 수 없다. EP 시기에 썼던 시들은 부주의함이나 얄팍한 감정을 특징으로 하는 만큼, 깊고 개인적인 감정이 표현된 시들은 그의 개인적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모리스가 자신의 인생에서 감춰두었던 시기인데, 이 시들은 자신의 당혹스러움과 절망을 표현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썼지만, 발표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아무튼 1867년과 1870년 사이에 출간된 시들의 반복적인 주제는 상호적이지 못한 사랑에 대한 비탄이다. 모리스는 제인 버든과의 결혼생활이 실패했다고 느꼈고 이 실패가 심대한 불행의 원이이었음이 분명하다. 모리스는 결혼생활에서 The Defence of Guenevere의 최고의 낭만적 이상이 아닌 실제 개인과 대면해야 했기에 상호 신뢰, 동료애, 지적 평등에 기반한 새롭고 진실한 관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가 실패에 직면한 것은 바로 낭만적 매혹에서 친밀한 관계로 옮겨가면서 이러한 노력을 할 때였다.
그가 추구한 것은 인간적 친밀함이었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강렬한 이상화된 경험에 대한 낭만적 충동과 사랑에서 삶의 도피처를 찾는 경향이 존재했다. 어떤 충동이 지배적이던 간에 두 충동 모두 아내 재니의 수동성 앞에 좌초되고 말았다. 주로 집안일과 관련된 것에만 두 사람의 관심이 일치할 뿐, 지성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는 것을 피했다.
재니와 모리스 간의 감정적인 단절이 이미 시작되었던 1860년 대 말, 아름다운 모델과 젊은 낭만주의적 화가로서 서로 알았던 사이인, 재니와 로제티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870년과 71년에 그들은 정기적으로 예술가 사교모임에서 함께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71년에 켈름스코트 저택를 모리스와 로제티가 공동으로 임차해서 살게 되었는데, 모리스는 그가 부재하는 동안 이 집이 재니와 아이들이 로제티와 어울릴 수 있는 가정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이 해에 아이슬란드를 처음 방문했다. 그의 이후의 작품들에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다. 재니에 대한 로제티의 애정이 강박적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자, 모리스는 두 삶의 관계가 차라리 빨리 진전되기를 원했다. 71년 여름 켈름스코트를 떠나기 전날 로제티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기로 의도했지만, 그런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72년)에 재니와 별거하고 부캐넌의 “육체파 시”에 대한 공격으로 고통받아, 로제티는 자살을 시도했다. 회복되어 그는 다시 케름스코트의 재니에게 되돌아왔다. 이후로도 이들의 관계는 계속 지속되었다.
모리스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얻은 것은 이 때(72년)이었다.
(편지 재인용)
“When I said there was no cause for my feeling low, I meant that my friends had not changed at all toward me in any way and that there had been no quarrelling: and indeed I am afraid it comes from some cowardice and unmanliness in me. One thing wanting ought not to go for so much: nor indeed does it spoil my enjoyment of life always, as I have often told you: to have real friends and some sort of an aim in life is so much, that I ought still think myself lucky: and often in my better moods I wonder what it is in me that throws me into such rage and despair at other times. I suspect, do you know, that some such moods would have come upon me at times even without this failure of mine"

이러한 깊은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재니와의 관계에서 잃어버렸던 공감을 그의 친구인 조지 번 존스와의 우정에서 찾았고 그들의 우정은 친밀하고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의 상실감 즉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에 몰두하고 아이슬란드 문헌을 번역하기도 하면서 이런 우울감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의 편지에 등장하는 “남자다운”이라는 말과 “남자답지 못한”이라는 말은 “희망”만큼이나 모리스에게 중요한 어휘이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자의 특질에서 부재하는 모리스 내부의 자질을 드러낸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자기연민의 만족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세상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다듬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아이슬란드와 그 오래된 모험담(saga)의 영향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그 안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점점 새롭고 원대한 “희망”에 사로 잡혀 그의 사적인 절망과 실패에 대한 언급을 좀체 하지 않았다. 이후의 모리스의 개인적 삶에 대한 동시대인의 언급은 거의 없지만, 그의 말년에 재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재니는 모리스의 사회주의적 견해와 활동과 친구들에게 적대적이었으며 동료들이 모이는 저녁식사자리에 보통은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리스가 재니와의 관계에서 우울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녀에 대한 일정한 애정과 충실함은 끝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News from Nowhere에서 그의 상실감의 깊이는 분명해진다. 그를 탬즈강에서 켈름스코트 저택으로 인도했던 소녀인 엘런에 대한 묘사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하려고 하는 모든 자질들을 투사한다. 화자와 엘렌의 관계는 부드러움, 솔직한 친밀감, 동료애, 평등한 지적 대화 등, 그가 바라는 바이지만 성취하지 못한 것들에 바탕한 관계이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기력한 전-라파엘파적 이상형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러나 그녀의 밝은 얼굴도 슬픈 기색을 띤 얼굴로 변해감으로써 모리스의 상실감은 최종적이고 회복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이 상실감이 그이 중년의 삶을 공허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미래에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그의 바람들이 실현된 희망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Chapter Ⅳ Hope and Courage
1. Kelmscott
1866년과 1876년 사이에 모리스는 수많은 관심과 즐거움의 원천들을 발견했다. 상회(the Firm) 일이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그의 딸들은 자라났으며 켈름스코트의 빈번한 방문이 그의 감각에 휴식과 신선함을 제공했다. 그의 개인적 불안은 오히려 손에 잡히는 어떠한 일에도 완전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켰다. 켈름스코트는 그땅과 땅위에서의 삶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새롭게 했다. 또한 여기에서 그는 노동과 휴식이 결합된 삶에 대한 만족감 속에서 역사의식을 깨우쳐나갔다.

2. Iceland
모리스의 위대함은 “가짜 시대”(age of shoddy)의 이상과 관행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점에서 그는 칼라일과 러스킨과 같이 가지만, 그의 위대함은 그러한 현재의 부패한 사회에 미래의 혁명을 기약할 수 있는 힘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1894년 글 재인용)
“The study of history and the love and practice of art forced me into a hatred of the civilization which, if things were to stop as they are, would turn into inconsequent nonsense, and make art a collection of the curiosities of the past, which would have no serious relation to the life of the present.
"But the consciousness of revolution stirring amidst our hateful modern society prevented me, luckier than many others of artistic perceptions, from crystallising into a mere railer against 'progress'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from wasting time and energy in any of the numerous schemes by which the quasi-artistic of the middle classes hope to make art grow when it has no longer any root, and thus I became a practical Socialist."

이러한 모리스의 혁명의식과 도덕적 용기는 예외적이고, 70년대 초기 절망의 시절에 갑작스럽게 자양분을 발견하여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힘의 발견은 그의 일, 켈름스코트, 우정, 개별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접촉, 그의 모든 일상적 삶으로터 오는 것이 아니라, 12세기 황량한 섬에 사는 가난한 민족의 활력과 포부로부터 온 것이다. 아이슬란드로부터 모리스는 용기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았다. 1860년대에 이미 모리스는 북구의 모험담으로부터 아이슬란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 당시에 모리스는 여기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했을 뿐, 그들의 영웅적 자질의 영향력을 감지하지 못하고 별 생각없이 그 모험담들을 중세로망스 언어로 변역했다. 1869년에 출간된 번역본의 서문에서 모리스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EP에서 표현된 것과는 매우 다른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적대적인 물적, 사회적 환경과 맞서는 인내와 용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아이슬란드에 대한 인상은 71년과 73년 아이슬란드를 방문함으로써 강화된다. 여행을 기록한 Journals에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있다. 그가 편지에서 밝히듯이,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한 진짜 본능”을 차가운 화산섬과 격렬한 신화에서 발견함으로써 그는 절망에서 빠져나와 말년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희망과 성공이 부재하고 실패와 패배와 적대적인 운명에 직면한 상황에서, 용기는 쇠퇴해가는 낭만주의의 자기함몰적인 우울을 극복하고, 개인적 삶뿐 아니라 세상과 대면할 때 필요한 자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귀족적이고 영웅적인 목적을 가진 사회에서나 타당하고 자기이해가 지배적인 윤리로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으므로, 모리스의 아이슬란드 사회와 그 모험담에 대한 반응에는 북구 사회의 이상과 그 자신의 사회이상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북구의 문학은 그에게 자신의 사회를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척도를 제공한 셈이다. 칼라일, 러스킨, 그리고 모리스 자신이 중세의 전자본주의 사회를 근거로 그들 사회를 비판했었지만, 이제 모리스는 새로운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그를 매혹시켰던 중세적 특징들은 현사회의 조악함을 강화시키는 데 공헌했을 뿐인 반면, 인내와 용기라는 북구의 가르침은 그 자신의 시대에서 투쟁의 희망과 힘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모험담을 번안하는 데 있어서 창작상의 문제도 만만치 않았고, 이러한 문제는 이러한 영역의 작품을 고려하는 데서도 중요하지만, 말년의 사회주의적 글쓰기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모리스는 낭만주의 운동의 아들이므로 낭만주의적 특징을 보이는 어휘와 말의 연상, 사고와 감정의 움직임 등은 그의 젊은 시절의 일부였다. 이러한 특징들이 펜을 들 때마다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이나 전망에 있어서 북구의 모험담만큼이나 19세기 낭만주의와 대척되는 것은 없다. 사실주의(리얼리즘)이야 말로 모험담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모리스가 19세기 영어로 모험담을 재창조하려고 했다면, 그는 낭만주의와 결정적으로 단절을 했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의 혁명적 변혁은 가장 위해한 창조적 집중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에 모리스는 그의 글쓰기를 시대와 대면하는 중심 거점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 벗어난 여가나 휴식 정도로 여겼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태도는 지적, 도덕적 에너지의 최대한 집중과는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리스가 북구 모험담의 진정한 정신을 영어로 옮기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그의 낭만주의적 글쓰기 기술이 그것을 약화시키고 왜곡했다고 해도, 선구자로서 그의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때때로 그는 의식적으로 모험담을 동시대적 주제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신의 사회에 대한 모리스의 감정, 그의 정치적 삶에 대한 참여의 의지를 느낄 수 있고 동시대인들에게 그 모험담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가 느꼈던 흥분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고 있다. 버다드 쑈는 모리스의 암송을 들은 후에 “That is the stuff for me, there is nothing like it"이라고 말했다.

Chapter Ⅴ. ACTION

1. "There is no Wealth but Life"
1876년 봄과 여름 기간 동안 모리스는 북구모험담을 번안하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시대에 맞서 “성전”을 벌이겠다는 젊은 시절의 충동을 새롭게 했다. 1877년 5월에는 동방문제협회 재무관(Treasurer of the Eastern Question Association)으로 일하면서 “영국의 노동자들에게”라는 유명한 선언문을 집필하였다. 마지막에서 그는 통찰력과 이해력에서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짤막한 말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리스의 활동과 관심사에서도 일어났었던 변화이다.
(선언문 재인용)
“Working-men of England, one word of warning yet: I doubt if you know the bitterness of hatred against freedom and progress that lies at the hearts of a certain part of the richer classes in this country: their newspapers veil it in a kind of decent language: but do but hear them talking among themselves, as I have often, and I know whether scorn or anger would prevail in you at their folly and insolence:--these men cannot speak of your its aims, of its leaders without a sneer or an insult: these men, if they had the power (may England perish rather) would thwart your just aspirations, would silence you, would deliver you bound hand and foot for ever to irresponsible capital--and these men, I say it deliberately, are the heart and soul of the party that is driving us to an unjust war."

이러한 변화가 완전히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모리스는 1860년대 중반에 다양한 사교모임 등에서 당대의 급진적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당대의 최신 민주의의, 공화주의적 견해를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견해에 공감했던 간에, 모리스는 50년대 이래 그를 짖누르던 절망감으로 이 시기에는 정치적 문제를 제쳐놓았던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70년대 초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그의 생각에 밀치고 들어온다. 모리스의 모든 서신과 글들에는 71년의 파리코뮌과 러스킨의 정치경제학과 윤리에 대한 후기 저작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것들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코뮌의 정확한 사건추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Fortnightly Review를 읽었다면 프레드릭 해리슨의 코뮌주의자에 대한 용기있는 옹호를 읽었을 것이다. 모리스의 코뮌 소식에 대한 반응은 그의 “스승”인 러스킨의 반응에 영향받았을 수도 있다. 러스킨의 Fors Clabigera 6,7장은 코뮌에 관한 뉴스의 흥분 속에서 집필되었고, 러스킨은 자신의 계급인 중산계급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혁명이 상류계급과 중산계급의 게으름과 불복종, 그리고 탐욕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공감은 루브르 박물관 방화 사건으로 억압되었다. 이 사건은 모리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러스킨의 “코뮌주의”는 토마스 모어와 가부장적 반동과 중세적 향수의 조각으로 만든 우스꽝스러운 절충적 몽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러스킨은 칼라일의 사도로서 주로 사회비평에 힘을 쏟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은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관점은 칼라일의 가르침에 많은 것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가치는 자본주의적 수요공급법칙으로는 표현될 수 없고 ‘삶’에 있다고 말하면서 삶이란 문제, 어려움, 시련, 물질적 힘 등과 싸우는 지성, 영혼, 물리적 힘이라고 하면서 노동이야말로 이러한 삶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중심적 고립 속에서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Past and Present의 “봉건 사회주의”에 갇혀 70년대 세상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모리스가 러스킨의 재단에 기부를 한 것은 사실이만, 그가 러스킨 말년의 십자군적 행보의 실천불가능성을 알아보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는 용(당시의 사회악)에 관한 의견에서 러스킨과 일치했지만, 그것을 죽이는 데는 중세적 창을 가진 예술비평가나 “문학가” 이상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70년대 초에 모리스가 코뮌이나 러스킨의 저작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었던 간에, 루브르 박물관 방화와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 그리고 러스킨의 애처로운 편벽은 그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다. 이것들은 오히려 희망의 원천인 노동계급 운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모리스에게는, 진보에 대해 냉소하거나 악담을 퍼붓는 데로 기울어지지 않으려면 능동적 참여를 통해 사회에 관한 진실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동방문제”, 고대 건물의 파괴와 “복원”, 그리고 상회와 관련된 창조적 야망의 교착상태, 이 세 가지 모두가 결합해서 능동적 사회참여로 그를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2. The "Eastern Question"
“동방문제”는 모리스의 공적인 삶에의 투신에서 가장 복잡한 사건으로 거의 모든 정치적 멜로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이었다. 동방문제협회 설립의 직접적인 이유는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저질러진 투르크 용병들의 만행이 발각된 후에 디즈레일리가 주도한 투르크와의 동맹체결에 저항하는 데 있었다. 1874년 보수당이 집권하자 디즈레일리는 동방 제국주의 정책에 착수했다. 이후 영국정부가 수에즈 운하의 지분을 사고 빅토리아 여왕의 직위가 “인도의 여왕”으로 선포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났다. 그동안 크림전쟁 이후 영국의 위성국가로 여겨졌던 부패한 투르크 제국 내에서 민족주의적 기독교도 폭동이 일어나 보스니아 등을 거쳐 가장 복종적인 지역인 불가리아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러시아의 자극과 지원을 받았는데, 러시아의 짜르(Tsar)는 국내 개혁에 대한 원성으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골몰하면서, 투르크를 포위와 기독교 지역 해방으로 위협함으로써 지식인들 사이에서 범슬라브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영국은 이 국면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정책으로 논쟁했다. 하나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투르크 제국을 러시아와 유럽의 다른 주요 열강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주장을 일축하고 투르크 제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국의 영향권 하래 두는 것이었다. 디즈레일리는 후자에 관심을 두었고, 76년 투르크 제국 내의 민족주의적 봉기 소식에 영국의 대중들이 동요했을 때, 그는 투르크 제국에게 유럽지역에서 개혁을 실시하라고 충고했다. 7월 23일 “불가리아 만행”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그것을 날조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항의가 발발했고, 이는 지도적인 자유당 정치인이 아닌 민중조직으로부터 나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중심적인 지도력이 없이 진행되던 이 전국적인 항거는 지역 자유당 연합, 급진적 비국교도, 노동자 조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그가 자유당 지도부에서 물러나있었던 글래드스토운인데 그는 민중적 항거 속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을 기회를 발견했다. 그는 끝임없이 이 동방문제에 관해 말했으나, 정작 그 항거운동을 좀 더 조직화하자는 생각에는 머뭇거렸다.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행동하는 반면, 노동자대표 동맹(Labour Representation League)은 런던 노동자들을 소집했다. 여기에서 러시아가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하면, 영국민들은 투르크 제국을 방어하려는 목적을 가진 영국정부의 조치나, 투르크 제국의 동유럽지역이 독립정부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되는 영국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시기에 모리스가 보낸 편지나 글들을 보면 그가 동방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음이 드러난다. 물론 사고의 순진함과 혼란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민중조직의 힘에 대한 놀라운 이해가 들어 있다.
(208페이지 재인용)
“In matter of peace and war, no Government durst go against the expressed will of the English people, when it has a will and can find time to express it... I say it would be impossible even for that clever trickster[Disraeli] to do this, not only if united England were in earnest to gainsay him, but even if a large minority were but half in earnest and spoke and said 'No'".

그러나 이러한 항거도 디즈레일리의 계획을 막지 못했다. 그는 영국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명분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했고 마침내 이에 대한 짜르의 성난 대답이 돌아와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었다. 이제 사안은 점점 복잡해졌다. 반세기 동안 러시아는 영국의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유럽의 반동의 보루로 여겨졌고, 소규모의 극좌파와 맑스나 해리스는 등의 소수 급진주의자들은 예외없이 러시아와 타협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짜르의 외교적, 군사적 실패가 전 세계적인 진보운동의 대의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그들은 투르크를 원조함으로써 디즈레일리와 여왕을 선봉으로 근동지역(Near East)의 지배력을 확보하고자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아야 했다. 반면에 억압받는 유럽 국가를 위해 반투르크 항거를 수행하는 진보단체들은 마찬가지로 자기이해를 추구하는 자유당 정치인과 러시아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76년 모리스의 한 편지는 후자의 비난을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리스의 곤경을 보여준다.
(편지 재인용)
“I know that the Russians have committed many crimes, but I cannot accuse them of behaving ill in this Turkish business at present, and I must say I think it very unfair of us, who freed our black men, to give them no credit for freeing their serfs: both deeds seem to me to be great landmarks in history... My cry and that of all that I consider really on our side is: 'The Turkish Government to the Devil, and something rational and progressive in its place'".

이렇듯 모리스만의 특별한 방안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의회의 항거운동 지지자들의 술책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먼델라가 주도한 동방문제협회에 모리스는 재무관으로 참여했고, 이에 대해 먼델라는 이 특별한 ‘문인’을 낚는데 매우 기뻐했지만, 모리스의 속내는 끝내 알지 못했다.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전쟁의 위험이 고조되는 77년에 이 협회 소속으로 모리스는 영국이 이러한 갈등국면에서 투르크의 편을 들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대표 동맹의 사람들과 접촉했는데, 이것이 노동자 조직과의 최초의 친밀한 접촉이었다.
노동자대표 동맹은 노농조합 지도자와 소수의 중산계급 급진주의자의 동맹조직으로서 노동자 후보자를 의회로 진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때때로 독립적으로 활동했지만, 점점 자유당으로 포섭되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에서 “자유당 노동계급주의”(Lib-Lab-ism)로 전락했지만, 동방문제 항거운동에서는 급진적 인터내셔널리즘의 옛 전통을 소생시켰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파리코뮌을 지지하는 등, 민주주의적 인터내셔널리즘을 포기할 수 이상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과 모리스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전쟁선포로 인해 동방문제협회와 노동자대표연맹이 공조하는 과정에서 이 연맹의 지도자들을 모리스가 소개받았을 것이다. 의회자유주의자들이 글래드스토운의 반투르크 결의안을 두고 동요하는 시점에서 모리스는 이러한 행태에 분개하고 노동자대표연맹의 입장을 높이 평가하며, “영국 노동자들에게”(앞에 일부 인용된 글)라는 선언문을 쓰게 되었다. 이 글 전체에서 모리스는 인터내셔널리즘의 진정한 힘과 항거의 중추로서 노동자 계급에 호소하고 있다.
항거의 일정한 성공으로 인해 단기간의 모호한 중립성이 보장되었다. 그 동안 투르크의 완강한 저항으로 러시아는 방어막을 뚫는 데 실패하고, 영국의 “애국주의적” 언론들은 지던 이기던 “용감한 투르크인들”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투르크의 주력부대가 붕괴되자 국내에서는 전쟁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상황은 “불가리아 만행” 시기의 광범위한 자발적 항거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내각과 여왕, “애국주의적” 언론들은 대러시아 전쟁을 독려했고, 반러시아 집회가 일부 노동계급의 지원 하에 성공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의회 구성원들을 더욱 신뢰할 수 없게 되자, 동방문제협회와 노동자대표 동맹에 중책이 맡겨졌다. 이들은 국회개원 전날 밤 “노동자 중립위원회”(Workmen's Neutrality Committee)를 공동 소집하고 여기에서 모리스는 반전 연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직업적 전쟁주의자들에 의해 러시아가 터기를 함락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뜨려지고 전쟁찬성 집회가 몇몇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열리는 등 전쟁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자유당은 무기력해졌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방문제협회는 하이드파크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으나 변덕스런 겨울날씨와 전쟁주의자들의 협잡으로 이를 취소했다. 일 년 전 만해도 유럽에서 투르크인들을 몰아내는 데 골몰했던 사람들이 적어도 런던에서는 철저하게 협작과 회유에 시달리게 되었다. 글래드스토운도 멀델라가 손을 떼는 기미를 보이자, 안심하고 그 일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리스는 그에게 어떤 책임을 떠넘기지는 않았고, 여전히 그를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여겼다. 물론 나중에 그가 여타 직업정치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이제 공은 전쟁주의자들 손에 넘어갔다. 디즈레일리가 전쟁을 하겠다면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왕이 또 한번의 크림 원정에 목말라하는 동안 그는 무력을 포기하고 복잡한 외교정책을 구사하면서 지중해에서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78년 3월에 러시아와 영국과의 동맹을 철저히 싫어하는 투르크 일파 간의 평화예비조약(Peace Preliminaries)이 승인되자, 영국 내각은 평화조약(Peace Treaty) 체결에서 영국은 지중해 동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전쟁주의자들은 실망했고, 동방문제협회는 사실상 사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대표 연맹은 결코 사멸하지 않고 투르크 지분소유자들의 음모에 대응해 강력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끝내 베를린 조약을 통해 디즈레일리는 자신의 목적 중 하나를 성취하게 되었다 베를린조약의 성립은 유럽세계 정국(政局)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열강의 외교관계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 회의에 의해서 불리한 입장에 놓인 러시아는 발칸반도의 남하진출이 저지되었고, 투르크는 산스테파노조약에서의 조건이 훨씬 가벼워졌지만 그 영토는 현저히 축소되었다. 이에 비해 영국은 베를린회의에서 외교적 승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해 투르크로부터 키프로스섬을 매수하여 그 승리를 더 굳혔다. 러시아는 이 회의에서 독일의 호의를 기대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열국과 함께 참석하였는데, 독일은 오히려 오스트리아의 배경이 됨으로써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독일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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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번째 정치입문의 경험은 모리스에게 여러 교훈을 주는 가르침이거나 아니면 혐오감으로 정치적 참여에 손을 떼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마지막 두 달 동안의 항거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토리당의 후안무치와 심각한 냉소주의, 직업정치인의 도덕적 비겁함과 기회주의, 노동계급의 힘에 대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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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세미나 발제문 <- 현재글

김재오
200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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