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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발표문: William Morris and the De

작성자

이순구

작성일자

2007-12-25

이메일

leesoonkoo@yahoo.co.kr

조회

3351


William Morris and the Decorative Arts

영미문학연구회
근대분과 세미나
발제자: 이순구
2007년 9월 15일


I. Introduction:

다음 20년: 60년대와 70년대: 시인으로서, 장식예술의 craftsman으로서의 명성을 쌓음. 이 시기의 그의 활약상은 J.W. Mackail의 전기와 Aymer Vallance의 연구서에 잘 묘사되어져 있다. 보통 이 기간은 그의 가장 풍성한 업적을 보여주는 기간으로 간주된다. 이 기간에 행해진 것들을 보면: 예) Red House 건물, Firm of Morris & Co.의 창립과 성장, The Earthly Paradise와 Sigurd the Volsung 발표, 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s의 결성, 다양한 예술과 사회에 대한 대중 강연들.

이 기간의 모리스의 personality는 아주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증언. 자주 분노하거나 boyish humor를 보여주었던 수줍고, 자의식이 강했던 청년 시절의 모습 대신에 모리스는 이제 세상에 bluff self assertive decision, vigorous application to detail, matter of fact workmanship의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것. ineffectual aesthete의 모습이 아니었다. 종종 sailor로 오해받았을 정도였다. 삶의 모든 쾌락을 기꺼이 즐기려는 듯 했고, 아주 직설적이고 사업가적인 모습을 보여줘 주변을 놀라게 했다.

1869; 그를 방문하고 쓴 헨리 제임스의 소감(89)
E. Magnusson의 묘사(89):
Ford Madox Hueffer의 묘사(90)

그러나 이러한 회상은 그에 대한 전체의 초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외적인 분위기에 대한 회상은 60년대, 70년대 초의 모리스의 시에 나타난 우울함이나 아주 사적인 편지들에 나타나는 그의 절망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이 기간의 진정한 모리스의 초상은 이처럼 그가 세상에 보여준 sturdy public character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큰 갈등과 사적인 불행으로 이루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의 흥망성쇠와 좌절을 통해 그는 sustaining strength를 끌어냈고, Firm과 관련된 그가 종사했던 지속적인 활동을 수단으로 a practical and sane grip on life를 유지했다.

II. Red House and the Firm

결혼 후 모리스는 지상에 예술궁의 모습을 구현할 집을 짓는데 관심을 쏟았다. 그는 생각과 행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환경에서도 그랫그라인드의 시대를 거부하고자 했다. 당시 건축에 대한 그의 혐오감(90-91). 모리스와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당시의 건물들을 자기들 시대의 불가피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낭만적 반항이 문학에서 터져 나왔다면, 그것은 또한 그들의 건축에서도 나타나 그것을 변형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그들은 물었다. 그리하여 모리스와 그의 친구 건축가인 Philip Webb은 Bexley Heath in Kent에 Red House를 짓기 시작했다. 이 집은 이전의 고딕 부활에서처럼 건축가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많은 피상적인 중세적인 특징들을 결합시키기 위한 게 아니었고, 건축의 후기 고딕 방식들을 19세기의 필요에 맞게 adapt 하기 위한 의도로 지어졌다. 오늘날 Red House는 놀랄만한 게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붉은 벽돌의 과감한 사용, 가식적이지 않은 축조방식, fussy facades와 비기능적인 장식의 부재로 혁명적이었다. 1863년 방문자의 이 집에 대한 소감(92).

porch에 들어가면 hall이 당시의 보통의 중산층 집의 좁고 추한 모습에 익숙한 자에게는 웅장하고 아주 단순한 것으로 나타났다. 붉은 타일 바닥 위에는 오크 식탁이 놓여져 있었고, 문 맞은편에는 넓은 오크 계단이 있었는데, 그 밑에는 어떤 걸레받이나 cupboard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축조는 모든 것을 드러냈다. 축조의 단순성과 직접성의 keynote는 많은 방에서도 반복되었다. 뚫린 지붕, 맨틀피스가 없는 벽돌로 된 큰 키의 open hearth, 벽 위의 엷은 distemper, rush-seated 의자들이 있었다. 본질적인 전체의 단순성과 나란히 풍성한 장식의 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solid cabinet 위의 색칠한 패널, 주요 침실 벽 위의 수놓은 serge, 천장 장식과 스테인드 글래스 등이 있었다. 이러한 단순성과 화려한 장식의 결합을 의식해 Burne-Jones는 모리스가 Red House를 “the Beautifullest place on earth"로 짓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집을 과감한 새로운 revival의 원형으로 본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Firm을 만들도록 한 것은 Red House를 furnish할 필요 때문에서였다. 그것은 처음에 단순히 모리스의 궁궐을 장식하는 일에 불과했다. 모리스와 번존스는 이미 Red Lion Square에서 그들의 studio를 furnishing할 때에 함께 협력한 바 있다. Red House에서는 로제티, 필립 웹, 매덕스,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도우려고 소집되었다. 스테인드 글래스를 위한 일을 이미 한바 있었던 존스는 이제 fire places를 위한 painted tiles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모리스는 벽에 쓸 것으로 모직에다 꽃모양을 그려 넣었다. 웹은 table-glass, metal candlesticks, furniture를 디자인했다. 이들 소그룹의 성공은 더 야심찬 일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로제티의 회상에 의하면 Firm의 실제적인 기원은 농담조의 casual discussion에서 나온 거였다(93). * 같이 읽어볼 것.

번존스는 모리스의 다소 의식적인 결정으로 회상했다. 구리광산(copper mines)으로부터의 그의 수입이 급격하게 줄었고, 화가로서의 그의 apprenticeship이 확고한 성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그는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생계를 벌여야 할 실제적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어느 모로 보나 minor arts가 그에게는 “완전한 degradation의 상태에 있는”(1883년 그의 회상) 게 확실했다. 그래서 “청년의 자만에 찬 용기로 그 모든 것을 내 자신이 개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기원에서 Firm은 사적이고 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적인 의미로 그것은 old "Brotherhood"를 삶에 투사하고, 19세기의 현실에 맞서 예술 세계를 축조하려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야심 찬 시도였다. 이것은 몇 년간 모리스의 생각 속에 끊임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1865년에 Firm의 작업장들이 그 안에 자리 잡고, 번존스가 살 거대한 사변형(quadrangle)으로서 Red House를 확장시키고자 계획을 세웠을 때 겉으로 표현되었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이 당시 rheumatic fever의 발병에서 회복하고 있던 모리스는 절망에 빠져 다음과 같이 친구에게 썼다(94).

그 뒤 곧바로 모리스와 Firm은 Queen Square에 있는 가까운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Red House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Firm의 공적인 의미는 모리스에게 아주 중요했다. 모든 것을 개혁하고, 장식 예술로서 속물적인 시대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가 되었다. 그리고 첫 단계로 arts 그 자체를 개혁하고자 했다. 로제티가 초안한 Firm의 맨 처음 광고 전단을 보면 “any species of decoration, mural or otherwise, from pictures, properly so called, down to the consideration of the smallest work of art beauty"를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제공된 일의 분야로는 벽장식, carving, stained glass, metal work, jewellery, 가구, 수놓기 등이있었다.

모리스가 죽자 바로 월터 크레인은 이 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94-95).

1851년 대영박람회 이래로 가사장식과 가구는 upholstery에 있어 제 2의 제국 취향이자, “새로운 영국의 운동의 antithesis"가 되어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후 디자이너들에게 지배적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forms에 대한 충동은 "죽은 듯이 보였다. 고전적인 의자와 소파의 우아한 선과 limbs는 ... 빅토리아조 가구장식업자들의 손에서 gouty and clumsy 해졌다. 1851년 박람회의 목록들은 당시 예술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가구와 장식에 있어서의 기이함을 충분히 보여준다. 해체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고, 가구와 의상과 장식에 있어서의 아마도 전례 없던 hideousness의 기간이 시작되어 제 2제국의 삶이 시작되었다.”(Walter Crane의 말) (95) *

레드 하우스 축조와 그것이 장식되고 가구를 비치한 비정통적인 방법들-- 이 모든 것은 그것이 부유한 사람의 사적 취미로 남아 있는 동안은 아주 좋았다. 그러나 Firm이 공적인 시장에서 기존의 trade에 도전했을 때, 그것은 속물적 취향과 기득권(vested interests)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Firm이 불러일으킨 편견은 당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96).

사실 초기의 사업 확장은 이 Firm의 상품을 구입할 만큼 충분히 부유한 대중들의 속물주의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active hostility of the trade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았다. 이것은 Firm으로 하여금 초기에 경쟁자가 별로 존재하지 않았던 ecclesiastical work에 전념 하도록 했던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였다. Firm이 최초의 작업 중의 몇 가지를 제출한 1862년 박람회에서 반대자들은 전시물들을 무효화하려는 청원을 내려고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스테인드 글래스가 사기고, old glass retouched라고 주장했다. 1867년이 되어서야, Firm은 처음으로 교회건물이 아닌 건물의 장식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것은 Green Dining Room at the South Kensington Museum이었다.

Firm이 확장되어 가자, 그것은 장식예술의 이러저러한 분야에서 the fussy and pretentious 한 것에 도전하는 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반세기를 회고하며 월터 크레인은 몇 가지 갈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97).

1870년대에 가면 Firm은 주문을 내는 부유한 사람들 속에서 최첨단을 걷게 되었다. 아주 격렬한 반대자들도 이제 그들의 디자인을 변경시켜야 했고, Firm의 사소한 피상적인 특징들을 그들 자신의 것에다 adapt해야 했다. 즉 Morris and Co. (최초의 파트너십이 1874년 안 좋게 깨졌고, 모리스는 번존스와 필립 웹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통솔했다)가 fashionable 해졌다. 게다가 반란은 상업적인 성공의 형식으로 풍부한 보상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 ^

만일 모리스가 장식 예술의 범위 안에서 개혁을 초래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면, 1870년대 말에 그는 만족했었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때 그의 비통함은 그의 유명한 예술과 사회 강연들에 표출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찾았던 개혁은 그 자신만의 예술 관행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arts는 시대와의 거룩한 전쟁을 치를 그의 초기의 반란이 선택한 forum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결코 낙담해하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장식예술에서 새로운 비스타를 열어주었으나, 매번 그는 더럽고 공리주의적 굴뚝과 이익을 위한 볼품없는 상품의 대량생산을 마주해야 했다. 그 자신만의 사적인 소득에 의해 그리고 돈 많은 사업가나 항수어린 성직자, 진정한 감수성과 취향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clientele의 도움으로 그의 예술의 둘레를 잠시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원 밖에서 시대는 무관심했거나, 혹은 전처럼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1883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98).* 그로 하여금 시대와 갈등하게 만든 것은 그의 실패가 아닌 그의 성공이었다.

III. Morris as a Designer and Craftsman

Firm의 초기 단계에 모리스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건전한 재정적 기반 위에, 그리고 가짜의 시대에 맞서 영국의 minor arts를 부활시키기 위한 의도를 지닌 일군의 예술가와 장인들을 발족해서 상당한 모험을 감행했다. 모리스는 스스로 주요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Firm의 주요한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이었고, 다른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디자인을 실행에 옮길 장인들, 그리고 일상적인 사업경영에 책임진 사람 사이의 주요한 연결고리였다.

처음부터 그는 존 러스킨의 작품들을 마음에 두었다(99). “우리 모두가 어떤 종류에서건 훌륭한 장인이 되고, 또 손에 의한 노동의 불명예가 완전히 없어진다면 좋은 일인 것이다. . . 각자의 직업에서 어느 대가도 힘든 노동을 아무리 자랑스럽게 여겨도 지나치지 않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던 중산층 계급에게는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은 모리스가 하고 있었던 일에서는 불가피했다. 모리스의 그룹 중 한 사람인 W.R.Lethay의 견해에 의하면 19세기의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 가운데는 아주 다른 두 종류의 “고딕 부활”의 흐름이 있었다. 첫째가 Sir Gilbert Scott 같은 사람들이 대변했던 fashionable one이 있다. “대부분 근대건물의 학문을 완전한 것으로 정착시키기보다는 디자인의 고딕 스타일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로 과거지향적인 운동을 추종했다.” (99).

러스킨과 모리스와 필립 웹 주변의 그룹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딕이라는 근대 이름을 붙인 건축은 석수와 목수들이 일을 했던 관습적인 방식이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귀족의 건축”은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해 18세기에 지배적이 되다 노동의 이러한 자연스런 방식들을 파괴했다. “국가의 arts는 gentility, learning, taste라는 이름으로 망가졌고, 파괴되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세주의자들의 두 부류는 날카롭게 구분되었다. fashionable한 건축가들은 그들의 노동에 피상적인 고딕 스타일을 impose하고자 했고, 종종 구조와 근대의 requirements를 무시하면서 흥미로운 고딕 특징들을 복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필립 웹과 모리스와 그들 그룹은 중세 노동의 manner, 중세의 건축가와 장인에 의한 materials의 handling, 스타일보다는 내용과 구조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구분은 디자이너로서의 모리스의 작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간혹 첫 번째 태도의 단점에 그도 빠질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접근의 에센스는 두 번째 것에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100). *

Firm이 관여하기 시작했던 많은 arts는 영국에서 이미 소멸했기 때문에, 모리스는 우선 arts의 substance와 장인의 노동의 실제적인 디테일들에 관심을 갖는 거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Firms의 창립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리스는 치밀한 연구, 실험, 그의 craft의 materials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고 항상 분주했다. glassfiring, glazing of tiles, embroidery, woodcutting, engraving, pottery, book binding, weaving, tapestrywork, illuminating 등은 그가 거의 정복하다시피 한 skills에 속했다. 그의 완전한 적용의 특징은 1870년대 중엽의 채소염료 사용의 부활을 위한 그의 결심에 나타났다. 몇 달간 그 문제는 그의 생각을 차지했고, 그는 옛날 책과 런던 박물관에서 그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염료통에 실험했고, 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은 그 생각을 계속했다. 그 다음에는 좀 더 큰 규모로 실험하고자 Leek를 방문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옛날의 염료 사용법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 그들의 충고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101-102).

모리스는 또한 장식 예술사에서 일급의 학자였다. 연구와 실습을 그는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결합은 tapestry weaving에서의 자신의 실험에서 표현되었다. 이 분야에서 그는 자신이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장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밀한 공부를 한 뒤 그는 그의 집의 침실에다 handloom을 설치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연구와 실습은 모든 장식 예술에서 그에게 대가로서의 권위를 부여했다.

1880년대에 행해진 장식예술에 대한 강연과 논문을 보면 이 당시의 가장 적극적인 실습 기간 동안에 그가 습득한 지식의 방대함을 보여준다. 고대, 이집크, 비잔틴, 페르시아, 인디아, 북유럽, 영국 전통에 대한 면밀한 연구로부터 끌어들인 지식이었다.

과거의 전통에 대한 연구는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103).

그러나 그의 관심은 디자이너의 노동의 완성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104).

모리스는 art products 그 자체의 질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이러한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manner,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한편으로 그는 스튜디오 안의 예술가와 디자인을 loom에 적용시키는 ‘grinding work' 외에 다른 할 일이 없는 기술적인 디자이너 사이의 분리를 비난했다. 다른 한편 그는 노동을 수행하는 자에게 그 자신만의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모리스가 러스킨과 공유했던 모든 원칙들 중에서 이것은 실행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분명히 이를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Firm이 확장되었고, Merton Abbey 작업장이 설립되자, 정상적인 상업적 관행과는 차이가 있는 노동의 방식이 행해졌다. 몇 군데의 작업장에서는 노련한 장인들이 처음부터 고용되어 모리스에게 그들의 business를 가르쳤고, 모든 실험에서 모리스와 함께 나란히 노동했다. 견습생을 선발할 때는 아주 예외적으로 재능 있고 탁월한 아이를 찾지 않도록 했다. 누구나 똑똑하면, 그 안에 예술가와 장인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특히 이것은 Merton Abbey에서의 tapestry work의 경우 정당화되었다. 이곳에서는 모리스가 죽었을 때 그 art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trained up 된 일군의 기술자들이 있었다. 1893년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하나를 보며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 흡족해했다. “이걸 만든 사람들은, 그리고 아직은 이게 가장 흥미로운 일이죠, 소년이랍니다. 지금쯤은 성인이 되었겠군요. 모두들 우리 가게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정말 자유스런 손놀림이었어요. 무늬를 베끼는 그런 노예적인 일이 아니었어요. 이들은 그리는 게 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우리에게 왔어요. 그리고는 우리의 훈련을 받고 이 모든 걸 배웠어요. 그런데 얼마나 잘 했나 보셔요.”(105).

carpet-making, weaving, jewellery, metal work, glass-making -- 이 모든 것은 장인의 창조적 이니셔티브의 행사를 위한 기회를 제공했다. Firm의 모든 branches의 환경은 노동자의 이니셔티브와 지적 능력을 끌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892년 자신의 결과를 회상하면서, 그는 그의 성취가 이 점에서 아주 모자랐다고 보았다. “노동의 좀더 예술적인 작은 측면을 제외하면 나는 노동자에게 이러한 쾌락을 주기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노동의 방식들을 아주 철저히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생계를 벌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는 중세의 art가 행해졌던 노동의 방식을 완전히 이해라해햐 했고, 그것만이 대중 예술일 수 있는 노동의 유일한 방식일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이익을 좇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manner로 노동을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105).

감독하고, 실험하고, 무엇보다도 디자인하고, 이러한 실제적인 노동은 Firm의 창립에서부터 그의 생의 마지막까지 그의 모든 다른 활동들의 지속적인 배경으로 기억되어져야 한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주요한 오락은 단지 다른 종류의 노동이었음은 모리스의 특징이다.” 이 노동의 방대함은 놀랍다. 1881년 일기의 기록의 예(106).

모리스는 말년에 두 개의 에세이에서 그의 pattern designing에서 그를 인도한 원칙들을 세웠다. 여기서 몇 개의 원칙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106-107). *

가짜는 그의 적이었다. 말년에 그는 외쳤다. “가짜의 시대다. 가짜가 왕이다. 정치인에서 구두 만드는 사람에까지 모든 게 가짜다. Firm은 처음부터 가짜와 싸웠다. 디자이너로서 그는 좋은 소재를 다루는 건전한 노동자정신, 장식적 디테일의 풍부함 등 이 두 개를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의 최초의 목표와 단순성, good quality에 있어 그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고의 디자인에서 지속되고 있는 경향의 주요한 선구자였다.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그의 몇 몇 작품들에 나타나는 고도의 정교함과 sweetness 때문에 그가 비난을 받는다면--그의 후기의 벽지와 chintzes의 무겁고 복잡한 장식적 라인들 때문에-- 그러나 그의 비평가들이 의존하는 텍스트와 실습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 역시 여전히 모리스다.

게다가 모리스의 두 번째 목표, 즉 장식의 풍요로움--은 부유한 계급 가운데서만 고객을 찾음으로써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참을 수 없었고, 흥분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그를 사회주의자의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 힘들 중 하나가 되었다. 고객에 대한 그의 퉁명한 매너, 그의 예술의 기준을 타협하길 거부했던 점은 유명했다. 이것은 그의 Firm을 fashionable society의 센터가 되도록 했다. 로제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그의 기이함과 후견인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태도는 그의 주변에 후견인들을 끌어 모았던 거 같다. 그러나 그를 따랐던 어린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힘든 고객들을 외면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모리스의 작업의 과도함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했다. 비록 그의 후견인들의 속물주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지만 모리스의 작품은 웅장하고 비싼 방식으로 계획되었다. 그리하여 큰 방들과 long perspectives에 적합했다. 죽을 때 모리스는 에드워드 카펜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가구와 벽지와 카펫과 커튼을 디자인하는데 거대한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와 같은 일이 거의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가장 소박한 whitewashed walls와 나무 의자들 나무 탁자들과 함께 살고 싶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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